[4/19 개봉작 리뷰] <눈부신 날에> - 눈부신 하늘 아래
입력시간 : 2007-04-16 09:10
컨테이너에서 사는 백수 건달 우종대(박신양)는 친구 동수(류승수)가 하는 야바위판에 바람잡이를 하던 중 고등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교도소행 직전의 종대를 찾아간 사회복지사 선영(예지원)은 합의를 대신 해주는 조건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보육원에서 지내다 입양되기 직전인 일곱 살배기 딸 준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것이다. 선영은 컨테이너로 돌아간 종대를 다시 찾아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줄 테니 준과 몇 달만 같이 지내달라고 부탁한다. 준을 딸로 받아들이지 않던 종대는 오로지 돈을 위해 준과 함께 지내기로 약속하고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한다. 준의 소원은 종대와 함께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종대에게 준과 지내는 일은 귀찮기만 하다. 불법 투견장을 운영하는 조직의 소싸움판 사기 도박에 가담한 종대는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위험한 처지에 몰린다. 여기에 동수의 배신은 종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고, 불치병을 앓던 준은 종대가 시키는 대로 컨테이터 위로 올라가 안테나를 잡고 있던 중 비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관습적인 과장을 배제한 신파극 <눈부신 날에>는 뜻밖에도 <이재수의 난>을 연출한 박광수 감독의 신작이다.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박광수 감독은 일관성 있게 다뤘던 사회적·역사적 이슈 대신 따뜻하고도 슬픈 가족 이야기를 <이재수의 난>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의 소재로 삼았다.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전 영화들과 맥락을 함께 하지만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명백히 가족이다. 다만 일반 가족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혈연 중심의 일반적 가족 형태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차원에서 사랑과 속죄, 구원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선영과 준의 관계가 그렇고 종대와 준의 관계가 그렇다. 인생 막장에 다다른 것과 다름없는 종대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준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면 준은 종대에게 구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사회적 이슈를 다뤄 온 중견 감독에게 <눈부신 날에>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비록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하지만, 형식상 고전 신파극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백수 건달이 자신의 딸이라고 찾아온 어린 소녀가 불치병으로 죽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가족이라는 한정된 인물군에 초점을 맞추고 죽음의 과정까지 안내하는 여타 신파 가족극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슬픔을 강요하기 위한 관습적 장치를 과하지 않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구닥다리 신파극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치병에 걸린 준이 주인공 종대에 비해 비중이 적으며 간헐적인 관찰의 대상이라는 점도 일반적인 신파극과 다른 점이다. 관객은 준의 시선을 따라가기보다는 종대의 시선을 좇아가게 된다. 종대의 삼류인생을 비추는 동안 준은 내러티브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신파 드라마와 인간 드라마 사이에서 오가는 동안 영화는 별다른 사건도, 감정적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영화의 절반을 마친다. 종대와 준의 관계보다는 종대의 험난한 삶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탓이다. 이것이 <눈부신 날에>의 장르를 가족 드라마라 말하기도 모호하고 인간 드라마로 포함시키기도 힘들게 만드는 이유다. 준과 종대가 처한 현실이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와 먼 것처럼 <눈부신 날에>의 사회적·종교적 메시지는 신파극의 최루성과 쉽사리 연결되지 못한다. <눈부신 날에>는 눈물도 감동도 강렬한 메시지도 전하지 않는 참 애매한 영화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굿 셰퍼드> - 이 남자가 사는 법
입력시간 : 2007-04-16 11:29
1961년 4월 쿠바의 반 혁명군 침공 작전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CIA 내부 첩자로 인해 정보가 유출되었음을 알게 되고,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CIA는 내부 첩자를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한다. 명문가 출신으로 예일대 재학 중 비밀 서클인 'Skull and Bones'에 가입한 후 첩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베테랑 요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도 예외는 아니다. 에드워드는 CIA 초창기부터 첩보 업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 요원으로, 어느날 그에게 익명의 녹음 테이프와 흑백 사진이 도착한다. 첩자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이 증거물의 정체를 밝혀나가면서, 에드워드는 자신의 CIA 활동을 거슬러 올라간다.
<굿 셰퍼드 The Good Shepherd>는 지난 1993년 <브롱크스 이야기 A Bronx Tale>로 성공적으로 감독 자리에 올라선 로버트 드 니로가 13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브롱크스 이야기>가 1960년대 뉴욕 브롱크스 무대의 갱스터의 이야기였다면 <굿 셰퍼드>는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미국의 지나간 역사에 시선을 돌리는 작품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1954년부터 74년까지 CIA에서 근무한 실존인물 제임스 앤젤톤에 토대를 두고 창조된 캐릭터다. <굿 셰퍼드>는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에드워드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며, CIA의 탄생과 몰락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첩보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굿 셰퍼드>의 각본을 담당한 사람은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인사이더 The Insider> 등 미국 역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에서 장기를 보인 에릭 로스. 철저한 시대 고증 작업을 거쳐 <굿 셰퍼드>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미국의 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러닝타임 167분 내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기본 이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경험한 아픈 기억으로 인해 나락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30년 동안의 삶을 치밀하게 연기한다. 그 외에 안젤리나 졸리, 윌리암 허트, 존 터투로, 알렉 볼드윈, 마이클 갬본, 빌리 크루덥 등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일급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또한 <굿 셰퍼드>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편집, 촬영, 의상, 미술 등 최고의 테크니션들로 가득한 영화지만, 감독 로버트 드 니로의 연출력은 다소 평범하다. 그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첩보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167분 만연체의 리듬을 타고 여러 차례 공명하는 데 그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로빈슨 가족> - 픽사와 디즈니의 행복한 만남
입력시간 : 2007-04-16 09:13
열두 살 소년 루이스의 첫 번째 소원은 친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입양을 신청한 부모들과 수십 차례 만나보기도 하지만, 취미로 만든 발명품을 자랑하다 번번이 사고만 쳐서 계속 고아원에 남아있는 처지가 된다. 같은 방 친구 굽의 밤잠을 방해하면서 완성한 루이스의 최근 발명품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메모리 스캐너. 어린이 발명대회에 참가한 루이스는 미래에서 왔다는 소년 윌버 로빈슨으로부터 악당 모자맨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모자맨이 꾸민 계략에 휘말려 메모리 스캐너를 빼앗긴 루이스는 발명품을 되찾기 위해 윌버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세계로 떠난다. 윌버 로빈슨의 가족은 개성이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하다. 개구리를 연습시켜 오케스트라를 만든 엄마, 옷을 뒤집어 입은 채 틀니를 찾아 집안을 헤매는 할아버지, 디스코 댄스에 심취한 할머니, 손가락 인형을 아내로 삼아 대화를 나누는 삼촌, 어릴 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해 어른이 돼서도 기차를 집안에서 가지고 노는 고모, 프로펠러가 달린 헬멧을 쓰고 날아다니며 벽화를 그리는 사촌 등 대가족 로빈슨 패밀리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 아래 메모리 스캐너를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던 윌버는 모자맨의 정체를 알아내고 깜짝 놀란다.
디즈니가 100퍼센트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첫 번째 3D 애니메이션 <치킨 리틀 Chicken Little>은 흥행에서는 꽤나 성공했지만 작품 자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고전적 방식의 2D를 버린 디즈니는 자사의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의 장점과 제휴사 픽사의 장점을 결합하려 했으나 <치킨 리틀>은 적절한 모범으로 남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로빈슨 가족 Meet the Robinsons>은 디즈니의 두 번째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픽사와 합병한 후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다. 디즈니 출신으로 픽사에 몸담으며 <토이 스토리 Toy Story> 시리즈와 <벅스 라이프 A Bug's Life> <카 Cars> 등을 감독하고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 <인크레더블 The Incredibles>를 제작한 존 라세터가 디즈니로 옮겨 처음으로 제작을 맡았다. <로빈슨 가족>은 <치킨 리틀>에 비해 디즈니와 픽사의 조화가 잘 이뤄진 작품이다. 영화 끝머리에 나오는 월트 디즈니의 말인 '계속 전진하라(keep moving forward)'에서 알 수 있듯 디즈니의 변화를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로빈슨 가족>의 원작은 윌리엄 조이스의 삽화 동화 [윌버 로빈슨과의 하루 A Day with Wilbur Robinson]이지만, 주인공 소년이 윌버 로빈슨의 집에 놀러가서 독특한 개성의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이 다르다. 소년의 이름이 루이스이고 발명이 취미인 고아라는 점, 미래에서 온 윌버를 따라 자신의 발명품을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점 등이 새롭게 첨가됐다. 영화에서 로빈슨 가족의 역할은 동화의 그것에 비해 크게 축소됐다.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할 뿐 루이스가 엄마를 찾는 데 있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캐릭터의 특성만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지만, 로빈슨 가족은 결말에서 제시되는 가족주의의 행복한 외형으로만 기능한다. 이것은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가족주의의 실현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다행히 <로빈슨 가족>이 진부한 가치관과 이야기로 일관하는 작품이 되지 않은 것은 픽사에서 영향받은 듯한 현대적인 감각 때문이다. 다분히 평면적이고 단순한 디즈니의 캐릭터들과 달리 <로빈슨 가족>의 캐릭터들은 입체적이고 다양하며 개성이 넘친다. 기발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어드벤처 역시 픽사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비록 픽사의 성공작들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로빈슨 가족>은 픽사와 디즈니의 성공적인 합병을 알리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 - 기획영화의 모범답안 혹은 한계
입력시간 : 2007-04-16 11:30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홀홀단신 한국행을 감행한 재일교포 준코(이청아).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하다.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는 듯한 게스트하우스의 학생들, 게다가 주인집 아들인 종만(박기웅)은 준코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다. 이를 견디다 못해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려던 준코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으로부터 특별 한국어 과외를 주선받는데, 과외 선생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인 종만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이하 '동갑내기 2')는 지난 2003년 개봉되어 전국 500만 관객을 동원한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4년만의 속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멜로와 코미디, 개그를 버무린 기획 영화. 영화의 두 주연인 권상우와 김하늘 사이에서 일어난 화학반응을 통해 흥행에 성공한 2003년 상반기의 최고 슬리퍼 히트작이다. <동갑내기 2>는 기본적으로 1편의 흥행 포인트를 충실하게 따른다. 초반부는 얼떨결에 스승과 제자의 위치에 처한 두 남녀의 좌충우돌기. 한국말이 서툰 재일교포 준코와 뚜렷한 삶의 목표도 가치관도 없는 '날라리' 대학생 종만이 서로 얽히고 설키게 되는 과정을 빠르고 경쾌한 호흡으로 풀어낸다. 물론 중반 이후는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는 종만과 준코의 멜로 라인으로, 영화는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급하게 나아간다.
등장 인물과 설정 등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갑내기 2>는 1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영화다. 바로 이 점에서 <동갑내기 2>의 한계점이 발견된다. 철지난 개그 프로의 재방송을 보는 듯, 이미 한 번 재미를 본 기획 요소의 재탕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편이 만화적인 상상과 이모티콘의 적절한 사용, 두 주인공의 연기 호흡에 기초하여 성공적인 캐릭터 코미디로 나아갔다면, <동갑내기 2>는 철저히 말장난과 음담패설에만 기댄다. 작년 초 '맷돌춤' 광고로 스타덤에 오른 신예 박기웅과 <늑대의 유혹> 이청아의 연기 호흡은 그럭저럭 볼만은 하지만, 원조 권상우와 김하늘의 그것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하나> - 복수보다는 피스~
입력시간 : 2007-04-16 09:12
태평천국 에도시대.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으로 즉위한 후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무사들은 칼을 쓰는 일이 없어지자 무력감에 빠진다. 동물을 우대하는 정책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개보다 천대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에도시대가 시작된 지 85년이 지난 1688년부터 1704년까지 계속된 켄로쿠시대에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1701년 3월 에도성에서 아코의 번주가 막부의 실세 키라에게 칼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아코의 번주는 할복을 명령받았고 번에 속해 있던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이듬해 12월 새벽 키라를 습격한다. 47인의 무사는 결국 모두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코사건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추신구라사건은 일본사람들이 가장 즐겨 듣는 이야기 중 하나로 미조구치 겐지의 <겐로쿠 추신구라 The 47 Ronin>, <47인의 자객 47 Ronin> 등으로 영화화됐고, 얼마 전 키무라 타쿠야 주연의 TV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다.
<하나 Hana Yori Mo Naho>의 배경은 추신구라사건의 한복판인 1702년이다. 역사적 사건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하나>는 직접적으로 추신구라사건과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가끔 사건의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고 작품의 마지막에는 47인 중의 한 낭인(주군을 잃고 떠도는 사무라이)이 습격에 가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의 중심 줄거리는 추신구라사건과 알레고리로 연결되는 한 사무라이 청년의 복수극이다. 사무라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하나>에는 칼을 들고 격투하는 장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액션 활극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봤다가는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나>는 추신구라사건의 본질인 맹목적인 충성과 복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 소자(오카다 준이치)는 원수가 살고 있는 에도의 한 마을에 정착한다. 도대체 실전 경험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젊은 사무라이 소자는 마을에 자리를 잡은 후 복수보다는 어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게다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옆집 미망인 오사에(미야자와 리에)는 소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복수의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버지를 죽인 카나자와(아사노 타다노부)를 찾아낸 소자는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 있는 원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껄렁껄렁한 백수건달 소데키치(카세 료)에게 얻어터질 정도로 소자의 실력 또한 형편없다. 이쯤 되니 마을 사람들도 복수는 어림도 없다며 소자를 말린다. 마을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생각을 바꾼 소자는 복수 대신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맹목적인 사무라이 정신과 복수의 시대에 오히려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9.11 사건과 그로 인해 변한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다.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와 장르를 반대의 시각으로 전복시켜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추신구라사건의 핵심 키워드인 할복마저도 <하나>에서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의식으로 풍자된다. 이는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e> <디스턴스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등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드러냈던 삶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의 아이러니와 모순 속에서 끌어낸 유머를 곳곳에 배치해 코미디 영화 같은 외양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소자와 카나자와가 서로 고개를 숙이고 마주하는 장면과 47인의 낭인 중 한 명이었던 키치에몬(테라지마 스스무)이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아들과의 삶을 택하는 장면은 <하나>가 말하는 바를 핵심적으로 전달한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표피적인 특징과 요란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소자를 포함한 빈민구역 소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관찰하며 느긋하게 러닝타임을 채운다. 떠들썩한 추신구라사건과 달리 마을사람들에게 생기는 일은 지극히 지엽적이고 개인적이다. 대의적 명분보다는 개인과 가족, 마을의 평안과 안녕이 우선이다. 감독은 그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찾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다. 코미디라는 장르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밝고 따뜻한 시각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일 뿐이지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적 쾌락을 배반한 채 공시적 가치를 통시적 가치로 재해석하는 감독의 철학을 읽을 때 <하나>를 보는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누군가는 "사무라이는 벚꽃처럼 미련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존재"라고 말하겠지만,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인 마고의 입을 빌려 "내년에 다시 필 것을 알기에 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한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선샤인> - 태양을 쏴라
입력시간 : 2007-04-16 09:57
지구에 또 한번의 빙하기가 찾아온다. 때는 2057년, 태양이 열기를 잃고 식어가자 지구에도 한파가 몰아 닥친다. 태양을 다시 불 타오르게 하기 위해 8명의 대원이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표면에 핵 폭탄을 발사해 태양이 다시 끓어오르게 하려는 임무를 띤 ‘이카루스 2호’의 우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긴 비행 끝에 태양에 근접하게 된 순간, 이카루스 2호는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신호와 만난다. 7년 전 이 길을 똑같이 지났을 조난된 우주선, 이카루스 1호가 보내는 조난 구호다. 1호 우주선이 갖고 있는 핵탄두까지 함께 태양에 던질 수 있다면 태양이 살아날 확률은 더욱 높아질 터. 핵물리학자 캐파(킬리언 머피)의 이러한 판단 아래 이카루스 2호는 1호가 있는 곳으로 궤도를 수정한다.
<28일 후… 28 Days Later…>의 멤버들이 <선샤인 Sunshine>에 또 다시 모였다. 대니 보일 감독과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각본가 알렉스 갈랜드와 제작자 앤드류 맥도널드까지 <28일 후…>의 핵심 멤버가 고스란히 넘어와 다시 한번 종말 직전의 인류를 그린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의 마지막 날들을 그린 <28일 후…>가 ‘인류 최후의 날’ 호러 좀비 버전이라면 <선샤인>은 SF 버전이라 할 만하다. 태양을 구해낼 목적으로 떠난 이카루스 2호는 이글거리는 태양은 물론 수성을 비롯한 숱한 우주 광경을 펼쳐 보인다. 실제 <선샤인> 제작팀이 가장 큰 공을 들인 건 우주선의 안팎을 포함한 우주 풍경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 태양의 실제 온도와 반사각도를 계산해 만든 미니어처와 CG로 태양 이미지를 그려내고, 우주선 내부의 생생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런던 동부에 대규모 세트를 세웠다. 우주선 내부 신들 모두 세트에서 직접 촬영한 반면, 외부 모습들은 미니어처를 만들어 CG로 합성하고 재조합 하며 영상에 공을 들였다.
이글거리는 태양 불꽃을 선보이는 <선샤인>은 분명 어떤 SF 영화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생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하지만 식어가는 태양을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한 무리의 대원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영화는 끝까지 흥미롭게 끌어가지 못한다. 이카루스 1호의 조난 구호를 받고 궤도를 옮기기까지의 초반은 흥미진진하다. 대원 각각의 엇갈리는 의견에 따라 갈등이 이어지고, 또 갈등을 봉합해가는 과정이 긴장 어린 드라마를 이룬다. 우연한 화재 사고로 대량의 산소를 잃게 되자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들도 인물 관계에 긴장을 새긴다. 그러나 이카루스 2호가 조난됐던 이카루스 1호와 만난 이후, 드라마는 급반전한다. 우주선 안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갑작스레 신과 인간의 관계를 들먹이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자 줄곧 긴장감을 유지해온 <선샤인>의 감정선은 이때부터 뒤죽박죽이 된다. 좀비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후반부의 ‘반전’ 덕택에 <선샤인>은 오히려 SF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잃었다.
<선샤인>의 다국적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배우들이 함께 했다. <28일 후…> 이후 다시 대니 보일과 만난 아일랜드 출신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링 The Ring> 시리즈의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와 <와호장룡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의 양자경 등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이 손을 맞잡았다.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무중력 비행, 비행 시뮬레이션 등의 '몸으로 쌓는' 우주 지식을 체득해야 했던 배우들은 천문학과 물리학 강의라는 '머리로 쌓는' 우주 지식까지 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