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국제영화제 여자연기상 내정 소식을 들은 영화배우 예지원(예지원)은 다음날 출국해 칸에서 레드 카펫을 밟을 생각에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나 지원의 행복한 상상을 산산조각내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이 있었으니. 바람둥이 데니스(리차드 김), 무식한 조폭 최사장(조희봉), 속물지식인 유교수(정경호), 소심한 영화감독 박감독(박노식)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지원에게 프로포즈를 해댄다. 기막힌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 남자들은 얼떨결에 하나씩 죽어나간다. 도대체 지원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1998년작 프랑스 영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 Serial Lover>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결혼할 남자를 결정하기 위해 애인들을 만찬에 초대한 여자가 우연한 사고로 남자들을 몰살한다는 내용의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는 독창적이고 기발한 설정과 이야기로 파리영화제, 시카고국제영화제, 몬트리올국제영화제 등 다수의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에도 그 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어,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단편 <기억, 발꿈치를 들다>로 주목받은 강경훈 감독의 장편 데뷔작 <죽어도 해피엔딩>의 이야기 구조는 기본적으로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와 동일하다. 추리소설가였던 여자 주인공이 인기 여배우로 바뀌었다는 정도가 다를 뿐. 판이한 성격과 외모, 배경의 네 남자는 '수컷의 본능'에 따라 모두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기막힌 상황 속에서 차례로 죽어나간다. <죽어도 해피엔딩>은 이런 기막힌 상황에 처한 여자 주인공이 하룻밤 동안 벌이는 일촉즉발 탈출기다.
<죽어도 해피엔딩>의 최대 장점은 단연 출연 배우들의 앙상블이다. 예지원은 실명 그대로 출연, 그녀 특유의 재기발랄함을 마음껏 스크린에 발산하며, 임원희, 정경호, 박노식, 조희봉, 장현성, 윤주상, 리차드 김, 우현 등 다른 출연배우들의 존재도 묵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죽어도 해피엔딩>에서는 <형사에겐 디저트가 없다>의 그림자가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 원작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이야기 전개 탓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는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소란하고 어지럽게 느껴진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이야기다.
태상준
birdcage@movielink.co.kr
<애프터 미드나잇> - 영화와 사랑에 대한 사색 |
|

마르티노(조르지오 파소티)는 이탈리아의 토리노 영화 박물관에서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는 청년이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마르티노는 박물관 지하에 보관된 오래된 영화들을 보며 위안을 얻는다. 거의 24시간을 영화 박물관에서 보내는 마르티노가 유일하게 외부와 접촉하는 순간은 햄버거 가게에서 햄버거를 살 때뿐이다. 햄버거를 싫어하는 마르티노가 매일밤 햄버거를 사는 것은 햄버거 가게 점원 아만다(프란체스카 이나우디)를 짝사랑하기 때문. 그런데 마르티노는 아만다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여본 적이 없다. 한편 아만다는 차량 절도범인 엔젤(파비오 트로이아나)과 연인이다. 그러나 엔젤은 사랑의 확신을 주지 못한 채 아만다를 외롭게 만든다. 어느날 밤 아만다가 사고를 치고 가게를 도망쳐 영화 박물관으로 찾아가게 되면서 마르티노와 아만다, 엔젤의 복잡한 관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영화 <애프터 미드나잇 After Midnight>은 영화를 사랑하는 한 청년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영화와 사랑에 대한 사색을 풀어놓는 작품이다. <애프터 미드나잇>은 영화 박물관에서 일하는 열혈 영화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영화와 일상을 자연스럽게 엮어낸다. 밤마다 영화 박물관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마르티노에게 영화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다. 또 짝사랑하는 아만다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지만, 자신이 만든 영화를 보여줌으로써 수줍게 사랑의 감정을 고백하기도 한다. 이때 영화는 고백의 도구가 된다. 영화와 인간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공존하는 모습을 <애프터 미드나잇>은 매력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러나 <애프터 미드나잇>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영화 속 영화들이다. 영화 박물관이라는 공간적 특성이 말해주듯 <애프터 미드나잇>에는 다양한 영화들이 소개된다. 특히 찰리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같은 무성영화 시대 거장들의 영화와 누벨바그의 대표주자인 프랑수와 트뤼포의 영화는 인물들의 감정과 심리를 드러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관객들에게는 무성영화와 누벨바그의 영화를 다시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영화와 소통하는 기쁨을 맛보고 영화를 통해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애프터 미드나잇>을 보면 된다.
최상희
immerblau@movielink.co.kr
<약지의 표본> - 잊고 싶은 기억을 봉인해드립니다 |
|

음료수 공장에서 일하던 이리스(올가 쿠릴렌코)는 사고로 약지 손가락의 끝부분을 잘린 후 공장을 그만둔다. 항구 도시로 새 일자리를 찾아 떠난 그녀는 표본실 조수를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그곳에서 일을 시작한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 표본실은 사람들이 잊고 싶은 물건들을 표본으로 만들어 영원히 봉인해주는 장소. 그저 사무 보조로 알고 온 이리스는 가슴 아픈 기억에 관련된 물건을 들고 오는 사람들을 매일 만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표본실 원장(마크 베르베)는 이리스에게 빨간 구두 한 켤레를 선물한다. 이리스는 구두를 신으면 신을수록 알 수 없는 편안함을 느끼고, 점점 원장을 사랑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약지의 표본 L'Annualaire>은 [박사가 사랑한 수식]으로 유명한 오가와 요코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정체를 알 수 없는 표본실 원장에게 구두 한 켤레를 선물로 받고 그에게 빠져드는 한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주인공 이리스가 일하게 되는 표본실에는 애처로운 추억이 담긴 물건들로 가득하다. 가족들이 화재로 모두 사망한 자리에서 자라난 버섯, 헤어진 연인에게 받은 악보, 유일한 친구였던 새의 뼈 등이 이리스에게 건네지며 묘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표본실 원장은 나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이리스의 주위를 유령처럼 맴도는 표본실 원장은 이리스와 점점 깊은 사이로 발전하지만 그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원장이 이리스의 환심을 사는 결정적인 물건은 바로 빨간 구두 한 켤레. <약지의 표본>은 동화 [빨간 구두]처럼 한 물건에 매료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리스의 모습을 통해 사랑, 집착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하지만 뚜렷한 사건 없이 몽환적인 분위기와 음산한 캐릭터들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탓에 변화하는 이리스의 심리를 따라가기는 다소 버겁다. 이리스가 빨간 구두를 벗고 자신의 약지를 봉인하기 위해 표본실로 들어가는 영화의 마지막은 급작스런 열린 결말을 취하고 있어 당혹스러운 것도 사실. <약지의 표본>은 패션 모델로 유명한 올가 쿠릴렌코의 영화 데뷔작이며, 매시브 어택, 트리키와 함께 1990년대 트립합 음악계를 이끌었던 포티스헤드의 핵심멤버 베스 기븐스가 음악 감독을 맡았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 - 어느 월북 미군 병사에 관하여 |
|

한국전쟁이 휴지 상태에 접어든 지 9년이 지난 1962년, 남북간 긴장이 여전히 감돌고 있던 때 한 미국 병사가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망명한다. 병사의 이름은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양부모 아래서 자란 고아소년 드레스녹은 양부모의 학대를 벗어나기 위해 가출했고, 불우한 청소년기를 지나 어린 나이인 18세에 군에 입대했다. 드레스녹이 서독에서 근무하던 사이 아내는 새 남자를 만났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드레스녹은 남한으로 파병돼 비무장지대의 ‘찰리 중대 제8기병대’에 배속된다. 무단 이탈로 군사재판에 회부되기 직전 드레스녹은 죽음을 각오하고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한으로 건너간다. 월북한 미군 병사는 드레스녹이 두 번째였다. 드레스녹이 북으로 건너가기 세 달 전 래리 앨런 앱셔가 월북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드레스녹의 망명이 알려진 후 두 명의 미군 병사가 1963년 12월, 1965년 1월 비무장지대를 건넌다. 제리 웨인 패리시와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이미 월북해 있던 두 병사와 합류해 북한 정부의 정치 선전에 동원된다.
이탈리아를 꺾고 월드컵 8강에 진출했던 북한 축구단에 대한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 The Game of Their Lives>과 북한의 매스게임에 참여한 두 소녀의 일상을 그린 <어떤 나라 A State of Mind>로 북한의 숨겨진 모습을 세상에 알린 다니엘 고든 감독이 북한에 관한 세 번째 다큐멘터리로 선택한 소재는 월북 미군병사 드레스녹이다. 이전 두 다큐멘터리가 북한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기보다 특정 인물들이나 사건들에 대한 작품이었듯 <푸른 눈의 평양 시민 Crossing the Line> 역시 북한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드레스녹이라는 특정 인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정보는 드레스녹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달되고, 여기에 드레스녹의 고향 친구, 부대 상사 등의 진술이 첨가된다. 감독은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인터뷰 내용과 보존문서, 필름 자료 들을 활용해 드레스녹과 세 미군 병사들에 대해 설명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이전 두 작품에 비해 도드라지지만, 다니엘 고든 감독은 변함 없이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한다.

다큐멘터리는 드레스녹의 인터뷰를 토대로 연대기를 따른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방황을 지나 드레스녹은 북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북한에서 만난 다른 세 미군 병사와 함께 드레스녹은 정치 선전에 가담하기도 하고,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며, 한 명의 가장이 되기도 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2005년 아내를 따라 일본행을 택한 젠킨스와 드레스녹의 대립구도다. 드레스녹은 북한에서의 삶을 행복하다고 말하고, 젠킨스는 일본으로 떠난 후 북한에서의 삶이 지옥 같았다고 주장한다. 감독은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드레스녹의 이야기를 더 많이 전하기는 하지만 누가 옳은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월북 병사들의 아내들에 관한 소문도 단지 전하기만 할 뿐 사실 판단에 대한 의도는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에서 살았다면 영화배우가 될 수도 없었을 테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낼 수도 없었을 것이며, 주말에 아이들과 볼링을 치며 여유롭게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드레스녹의 이야기 속에는 이데올로기의 대립보다 개인의 행복추구권이 우선시된다. <푸른 눈의 평양 시민>이 질문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고경석
kave@movielink.co.kr
<관타나모로 가는 길> - 관타나모 수용소에 대한 실화 다큐 |
|
.jpg)
2001년 9월 영국 팁튼에 사는 네 명의 파키스탄계 영국인 청년 아시프, 루엘, 샤피크, 모니르는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파키스탄에 도착한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으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그러나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는커녕 도착한 후 얼마되지 않아 한 명은 실종되고 나머지 세 명은 미군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된다. 미군은 이들을 국제 테러조직의 일원으로 단정하고 끊임없는 고문과 심문을 이어간다. 아프가니스탄의 카라치, 칸다하르, 카불, 쿤두즈, 쉐버간에 이어 관타나모로 끌려간 이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으며 2년여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를 만들지만 특별히 정치색을 띤 작품들에서 두각을 드러내온 영국 감독이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아프가니스탄 난민 캠프를 탈출한 소년의 행로를 담은 로드무비 <인 디스 월드 In This World>에 이어 다시 한번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에 눈을 돌려 <관타나모로 가는 길 The Road to Guantanamo>를 선보였다. 2003년 <인 디스 월드>로 2003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한 마이클 윈터바텀은 <관타나모로 가는 길>로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했다.
.jpg)
<관타나모로 가는 길>은 세 명의 파키스탄계 영국인 청년들이 테러리스트로 오인받고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후 혐의를 벗고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을 고발한 세미 다큐멘터리이다. 영화는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혀 있었던 세 청년의 여정을 배우들을 통해 재현해내는 동시에 실제 인물인 아시프, 루엘, 사피크의 인터뷰와 뉴스 화면을 중간중간 삽입하는 형식을 취한다. 영화는 내전으로 황폐해진 아프가니스탄 풍경부터 미군들이 포로들에게 행하는 고문과 인권유린의 실태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웬만하면 이슬람인들을 9.11 테러와 연관시키는 미국의 편협한 태도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사실과 허구를 넘나들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집중한다. "관타나모와 같은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마이클 윈터버텀의 의도대로 영화는 아프가니스탄과 관타나모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이 200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고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때만 해도 우리에게 중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23명이 탈레반에 의해 피랍되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달 여가 지난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제 우리 자신의 일이 되어 버렸다. <관타나모로 가는 길>을 먼나라 일처럼 마음 편하게 볼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