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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4.18 4월3주차 개봉영화
- 2007.04.11 4월2주 개봉영화
- 2007.04.05 4월1주차 개봉영화
- 2007.03.28 3월 마지막주, 개봉영화
- 2007.03.21 3월 22일 개봉영화 2
- 2007.02.21 2월22일, 개봉영화 리뷰
- 2007.02.07 2월2주, 개봉영화 리뷰~
글
4월3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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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서 사는 백수 건달 우종대(박신양)는 친구 동수(류승수)가 하는 야바위판에 바람잡이를 하던 중 고등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교도소행 직전의 종대를 찾아간 사회복지사 선영(예지원)은 합의를 대신 해주는 조건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보육원에서 지내다 입양되기 직전인 일곱 살배기 딸 준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것이다. 선영은 컨테이너로 돌아간 종대를 다시 찾아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줄 테니 준과 몇 달만 같이 지내달라고 부탁한다. 준을 딸로 받아들이지 않던 종대는 오로지 돈을 위해 준과 함께 지내기로 약속하고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한다. 준의 소원은 종대와 함께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종대에게 준과 지내는 일은 귀찮기만 하다. 불법 투견장을 운영하는 조직의 소싸움판 사기 도박에 가담한 종대는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위험한 처지에 몰린다. 여기에 동수의 배신은 종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고, 불치병을 앓던 준은 종대가 시키는 대로 컨테이터 위로 올라가 안테나를 잡고 있던 중 비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관습적인 과장을 배제한 신파극 <눈부신 날에>는 뜻밖에도 <이재수의 난>을 연출한 박광수 감독의 신작이다.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박광수 감독은 일관성 있게 다뤘던 사회적·역사적 이슈 대신 따뜻하고도 슬픈 가족 이야기를 <이재수의 난>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의 소재로 삼았다.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전 영화들과 맥락을 함께 하지만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명백히 가족이다. 다만 일반 가족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혈연 중심의 일반적 가족 형태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차원에서 사랑과 속죄, 구원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선영과 준의 관계가 그렇고 종대와 준의 관계가 그렇다. 인생 막장에 다다른 것과 다름없는 종대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준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면 준은 종대에게 구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사회적 이슈를 다뤄 온 중견 감독에게 <눈부신 날에>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비록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하지만, 형식상 고전 신파극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백수 건달이 자신의 딸이라고 찾아온 어린 소녀가 불치병으로 죽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가족이라는 한정된 인물군에 초점을 맞추고 죽음의 과정까지 안내하는 여타 신파 가족극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슬픔을 강요하기 위한 관습적 장치를 과하지 않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구닥다리 신파극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치병에 걸린 준이 주인공 종대에 비해 비중이 적으며 간헐적인 관찰의 대상이라는 점도 일반적인 신파극과 다른 점이다. 관객은 준의 시선을 따라가기보다는 종대의 시선을 좇아가게 된다. 종대의 삼류인생을 비추는 동안 준은 내러티브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신파 드라마와 인간 드라마 사이에서 오가는 동안 영화는 별다른 사건도, 감정적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영화의 절반을 마친다. 종대와 준의 관계보다는 종대의 험난한 삶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탓이다. 이것이 <눈부신 날에>의 장르를 가족 드라마라 말하기도 모호하고 인간 드라마로 포함시키기도 힘들게 만드는 이유다. 준과 종대가 처한 현실이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와 먼 것처럼 <눈부신 날에>의 사회적·종교적 메시지는 신파극의 최루성과 쉽사리 연결되지 못한다. <눈부신 날에>는 눈물도 감동도 강렬한 메시지도 전하지 않는 참 애매한 영화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굿 셰퍼드> - 이 남자가 사는 법
1961년 4월 쿠바의 반 혁명군 침공 작전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CIA 내부 첩자로 인해 정보가 유출되었음을 알게 되고,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CIA는 내부 첩자를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한다. 명문가 출신으로 예일대 재학 중 비밀 서클인 'Skull and Bones'에 가입한 후 첩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베테랑 요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도 예외는 아니다. 에드워드는 CIA 초창기부터 첩보 업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 요원으로, 어느날 그에게 익명의 녹음 테이프와 흑백 사진이 도착한다. 첩자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이 증거물의 정체를 밝혀나가면서, 에드워드는 자신의 CIA 활동을 거슬러 올라간다.
<굿 셰퍼드 The Good Shepherd>는 지난 1993년 <브롱크스 이야기 A Bronx Tale>로 성공적으로 감독 자리에 올라선 로버트 드 니로가 13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브롱크스 이야기>가 1960년대 뉴욕 브롱크스 무대의 갱스터의 이야기였다면 <굿 셰퍼드>는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미국의 지나간 역사에 시선을 돌리는 작품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1954년부터 74년까지 CIA에서 근무한 실존인물 제임스 앤젤톤에 토대를 두고 창조된 캐릭터다. <굿 셰퍼드>는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에드워드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며, CIA의 탄생과 몰락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첩보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굿 셰퍼드>의 각본을 담당한 사람은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인사이더 The Insider> 등 미국 역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에서 장기를 보인 에릭 로스. 철저한 시대 고증 작업을 거쳐 <굿 셰퍼드>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미국의 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러닝타임 167분 내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기본 이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경험한 아픈 기억으로 인해 나락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30년 동안의 삶을 치밀하게 연기한다. 그 외에 안젤리나 졸리, 윌리암 허트, 존 터투로, 알렉 볼드윈, 마이클 갬본, 빌리 크루덥 등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일급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또한 <굿 셰퍼드>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편집, 촬영, 의상, 미술 등 최고의 테크니션들로 가득한 영화지만, 감독 로버트 드 니로의 연출력은 다소 평범하다. 그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첩보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167분 만연체의 리듬을 타고 여러 차례 공명하는 데 그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열두 살 소년 루이스의 첫 번째 소원은 친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입양을 신청한 부모들과 수십 차례 만나보기도 하지만, 취미로 만든 발명품을 자랑하다 번번이 사고만 쳐서 계속 고아원에 남아있는 처지가 된다. 같은 방 친구 굽의 밤잠을 방해하면서 완성한 루이스의 최근 발명품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메모리 스캐너. 어린이 발명대회에 참가한 루이스는 미래에서 왔다는 소년 윌버 로빈슨으로부터 악당 모자맨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모자맨이 꾸민 계략에 휘말려 메모리 스캐너를 빼앗긴 루이스는 발명품을 되찾기 위해 윌버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세계로 떠난다. 윌버 로빈슨의 가족은 개성이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하다. 개구리를 연습시켜 오케스트라를 만든 엄마, 옷을 뒤집어 입은 채 틀니를 찾아 집안을 헤매는 할아버지, 디스코 댄스에 심취한 할머니, 손가락 인형을 아내로 삼아 대화를 나누는 삼촌, 어릴 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해 어른이 돼서도 기차를 집안에서 가지고 노는 고모, 프로펠러가 달린 헬멧을 쓰고 날아다니며 벽화를 그리는 사촌 등 대가족 로빈슨 패밀리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 아래 메모리 스캐너를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던 윌버는 모자맨의 정체를 알아내고 깜짝 놀란다.
디즈니가 100퍼센트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첫 번째 3D 애니메이션 <치킨 리틀 Chicken Little>은 흥행에서는 꽤나 성공했지만 작품 자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고전적 방식의 2D를 버린 디즈니는 자사의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의 장점과 제휴사 픽사의 장점을 결합하려 했으나 <치킨 리틀>은 적절한 모범으로 남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로빈슨 가족 Meet the Robinsons>은 디즈니의 두 번째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픽사와 합병한 후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다. 디즈니 출신으로 픽사에 몸담으며 <토이 스토리 Toy Story> 시리즈와 <벅스 라이프 A Bug's Life> <카 Cars> 등을 감독하고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 <인크레더블 The Incredibles>를 제작한 존 라세터가 디즈니로 옮겨 처음으로 제작을 맡았다. <로빈슨 가족>은 <치킨 리틀>에 비해 디즈니와 픽사의 조화가 잘 이뤄진 작품이다. 영화 끝머리에 나오는 월트 디즈니의 말인 '계속 전진하라(keep moving forward)'에서 알 수 있듯 디즈니의 변화를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로빈슨 가족>의 원작은 윌리엄 조이스의 삽화 동화 [윌버 로빈슨과의 하루 A Day with Wilbur Robinson]이지만, 주인공 소년이 윌버 로빈슨의 집에 놀러가서 독특한 개성의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이 다르다. 소년의 이름이 루이스이고 발명이 취미인 고아라는 점, 미래에서 온 윌버를 따라 자신의 발명품을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점 등이 새롭게 첨가됐다. 영화에서 로빈슨 가족의 역할은 동화의 그것에 비해 크게 축소됐다.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할 뿐 루이스가 엄마를 찾는 데 있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캐릭터의 특성만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지만, 로빈슨 가족은 결말에서 제시되는 가족주의의 행복한 외형으로만 기능한다. 이것은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가족주의의 실현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다행히 <로빈슨 가족>이 진부한 가치관과 이야기로 일관하는 작품이 되지 않은 것은 픽사에서 영향받은 듯한 현대적인 감각 때문이다. 다분히 평면적이고 단순한 디즈니의 캐릭터들과 달리 <로빈슨 가족>의 캐릭터들은 입체적이고 다양하며 개성이 넘친다. 기발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어드벤처 역시 픽사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비록 픽사의 성공작들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로빈슨 가족>은 픽사와 디즈니의 성공적인 합병을 알리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 - 기획영화의 모범답안 혹은 한계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홀홀단신 한국행을 감행한 재일교포 준코(이청아).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하다.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는 듯한 게스트하우스의 학생들, 게다가 주인집 아들인 종만(박기웅)은 준코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다. 이를 견디다 못해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려던 준코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으로부터 특별 한국어 과외를 주선받는데, 과외 선생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인 종만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이하 '동갑내기 2')는 지난 2003년 개봉되어 전국 500만 관객을 동원한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4년만의 속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멜로와 코미디, 개그를 버무린 기획 영화. 영화의 두 주연인 권상우와 김하늘 사이에서 일어난 화학반응을 통해 흥행에 성공한 2003년 상반기의 최고 슬리퍼 히트작이다. <동갑내기 2>는 기본적으로 1편의 흥행 포인트를 충실하게 따른다. 초반부는 얼떨결에 스승과 제자의 위치에 처한 두 남녀의 좌충우돌기. 한국말이 서툰 재일교포 준코와 뚜렷한 삶의 목표도 가치관도 없는 '날라리' 대학생 종만이 서로 얽히고 설키게 되는 과정을 빠르고 경쾌한 호흡으로 풀어낸다. 물론 중반 이후는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는 종만과 준코의 멜로 라인으로, 영화는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급하게 나아간다.
등장 인물과 설정 등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갑내기 2>는 1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영화다. 바로 이 점에서 <동갑내기 2>의 한계점이 발견된다. 철지난 개그 프로의 재방송을 보는 듯, 이미 한 번 재미를 본 기획 요소의 재탕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편이 만화적인 상상과 이모티콘의 적절한 사용, 두 주인공의 연기 호흡에 기초하여 성공적인 캐릭터 코미디로 나아갔다면, <동갑내기 2>는 철저히 말장난과 음담패설에만 기댄다. 작년 초 '맷돌춤' 광고로 스타덤에 오른 신예 박기웅과 <늑대의 유혹> 이청아의 연기 호흡은 그럭저럭 볼만은 하지만, 원조 권상우와 김하늘의 그것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하나> - 복수보다는 피스~
태평천국 에도시대.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으로 즉위한 후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무사들은 칼을 쓰는 일이 없어지자 무력감에 빠진다. 동물을 우대하는 정책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개보다 천대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에도시대가 시작된 지 85년이 지난 1688년부터 1704년까지 계속된 켄로쿠시대에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1701년 3월 에도성에서 아코의 번주가 막부의 실세 키라에게 칼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아코의 번주는 할복을 명령받았고 번에 속해 있던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이듬해 12월 새벽 키라를 습격한다. 47인의 무사는 결국 모두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코사건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추신구라사건은 일본사람들이 가장 즐겨 듣는 이야기 중 하나로 미조구치 겐지의 <겐로쿠 추신구라 The 47 Ronin>, <47인의 자객 47 Ronin> 등으로 영화화됐고, 얼마 전 키무라 타쿠야 주연의 TV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다.
<하나 Hana Yori Mo Naho>의 배경은 추신구라사건의 한복판인 1702년이다. 역사적 사건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하나>는 직접적으로 추신구라사건과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가끔 사건의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고 작품의 마지막에는 47인 중의 한 낭인(주군을 잃고 떠도는 사무라이)이 습격에 가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의 중심 줄거리는 추신구라사건과 알레고리로 연결되는 한 사무라이 청년의 복수극이다. 사무라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하나>에는 칼을 들고 격투하는 장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액션 활극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봤다가는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나>는 추신구라사건의 본질인 맹목적인 충성과 복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 소자(오카다 준이치)는 원수가 살고 있는 에도의 한 마을에 정착한다. 도대체 실전 경험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젊은 사무라이 소자는 마을에 자리를 잡은 후 복수보다는 어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게다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옆집 미망인 오사에(미야자와 리에)는 소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복수의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버지를 죽인 카나자와(아사노 타다노부)를 찾아낸 소자는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 있는 원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껄렁껄렁한 백수건달 소데키치(카세 료)에게 얻어터질 정도로 소자의 실력 또한 형편없다. 이쯤 되니 마을 사람들도 복수는 어림도 없다며 소자를 말린다. 마을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생각을 바꾼 소자는 복수 대신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맹목적인 사무라이 정신과 복수의 시대에 오히려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9.11 사건과 그로 인해 변한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다.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와 장르를 반대의 시각으로 전복시켜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추신구라사건의 핵심 키워드인 할복마저도 <하나>에서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의식으로 풍자된다. 이는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e> <디스턴스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등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드러냈던 삶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의 아이러니와 모순 속에서 끌어낸 유머를 곳곳에 배치해 코미디 영화 같은 외양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소자와 카나자와가 서로 고개를 숙이고 마주하는 장면과 47인의 낭인 중 한 명이었던 키치에몬(테라지마 스스무)이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아들과의 삶을 택하는 장면은 <하나>가 말하는 바를 핵심적으로 전달한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표피적인 특징과 요란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소자를 포함한 빈민구역 소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관찰하며 느긋하게 러닝타임을 채운다. 떠들썩한 추신구라사건과 달리 마을사람들에게 생기는 일은 지극히 지엽적이고 개인적이다. 대의적 명분보다는 개인과 가족, 마을의 평안과 안녕이 우선이다. 감독은 그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찾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다. 코미디라는 장르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밝고 따뜻한 시각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일 뿐이지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적 쾌락을 배반한 채 공시적 가치를 통시적 가치로 재해석하는 감독의 철학을 읽을 때 <하나>를 보는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누군가는 "사무라이는 벚꽃처럼 미련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존재"라고 말하겠지만,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인 마고의 입을 빌려 "내년에 다시 필 것을 알기에 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한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선샤인> - 태양을 쏴라
지구에 또 한번의 빙하기가 찾아온다. 때는 2057년, 태양이 열기를 잃고 식어가자 지구에도 한파가 몰아 닥친다. 태양을 다시 불 타오르게 하기 위해 8명의 대원이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표면에 핵 폭탄을 발사해 태양이 다시 끓어오르게 하려는 임무를 띤 ‘이카루스 2호’의 우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긴 비행 끝에 태양에 근접하게 된 순간, 이카루스 2호는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신호와 만난다. 7년 전 이 길을 똑같이 지났을 조난된 우주선, 이카루스 1호가 보내는 조난 구호다. 1호 우주선이 갖고 있는 핵탄두까지 함께 태양에 던질 수 있다면 태양이 살아날 확률은 더욱 높아질 터. 핵물리학자 캐파(킬리언 머피)의 이러한 판단 아래 이카루스 2호는 1호가 있는 곳으로 궤도를 수정한다.
<28일 후… 28 Days Later…>의 멤버들이 <선샤인 Sunshine>에 또 다시 모였다. 대니 보일 감독과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각본가 알렉스 갈랜드와 제작자 앤드류 맥도널드까지 <28일 후…>의 핵심 멤버가 고스란히 넘어와 다시 한번 종말 직전의 인류를 그린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의 마지막 날들을 그린 <28일 후…>가 ‘인류 최후의 날’ 호러 좀비 버전이라면 <선샤인>은 SF 버전이라 할 만하다. 태양을 구해낼 목적으로 떠난 이카루스 2호는 이글거리는 태양은 물론 수성을 비롯한 숱한 우주 광경을 펼쳐 보인다. 실제 <선샤인> 제작팀이 가장 큰 공을 들인 건 우주선의 안팎을 포함한 우주 풍경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 태양의 실제 온도와 반사각도를 계산해 만든 미니어처와 CG로 태양 이미지를 그려내고, 우주선 내부의 생생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런던 동부에 대규모 세트를 세웠다. 우주선 내부 신들 모두 세트에서 직접 촬영한 반면, 외부 모습들은 미니어처를 만들어 CG로 합성하고 재조합 하며 영상에 공을 들였다.
이글거리는 태양 불꽃을 선보이는 <선샤인>은 분명 어떤 SF 영화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생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하지만 식어가는 태양을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한 무리의 대원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영화는 끝까지 흥미롭게 끌어가지 못한다. 이카루스 1호의 조난 구호를 받고 궤도를 옮기기까지의 초반은 흥미진진하다. 대원 각각의 엇갈리는 의견에 따라 갈등이 이어지고, 또 갈등을 봉합해가는 과정이 긴장 어린 드라마를 이룬다. 우연한 화재 사고로 대량의 산소를 잃게 되자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들도 인물 관계에 긴장을 새긴다. 그러나 이카루스 2호가 조난됐던 이카루스 1호와 만난 이후, 드라마는 급반전한다. 우주선 안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갑작스레 신과 인간의 관계를 들먹이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자 줄곧 긴장감을 유지해온 <선샤인>의 감정선은 이때부터 뒤죽박죽이 된다. 좀비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후반부의 ‘반전’ 덕택에 <선샤인>은 오히려 SF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잃었다.
<선샤인>의 다국적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배우들이 함께 했다. <28일 후…> 이후 다시 대니 보일과 만난 아일랜드 출신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링 The Ring> 시리즈의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와 <와호장룡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의 양자경 등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이 손을 맞잡았다.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무중력 비행, 비행 시뮬레이션 등의 '몸으로 쌓는' 우주 지식을 체득해야 했던 배우들은 천문학과 물리학 강의라는 '머리로 쌓는' 우주 지식까지 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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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4월2주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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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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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라곤 딱 열일곱 명인 작은 섬, 극락도. 적은 식구지만 보건소와 학교를 다 갖춘 마을다운 마을, 이웃 사이에 정이 가득한 인심 좋은 마을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을 어른 김노인(김인문)의 칠순 잔칫날 밤까지의 얘기다. 밤 사이 벌어진 화투판에서 송전 기사 두 명이 주검이 돼 나타나자 마을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다. 물론 이게 끝이라면 그저 ‘사건’으로 남았을 테다. 문제는 다음부터. 강력한 용의자였던 덕수부터 한 사람씩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을 필두로 초등학교 선생 장귀남(박솔미)과 마을 이장(최주봉)이 머리를 맞대어 보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 뿐이다. 극락도에서 열일곱 명의 자취가 모두 사라질 그날까지.
섬은 사면을 바다로 향한, 하늘을 머리에 둔 열린 공간이자 뭍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닫힌 공간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의 인디언 섬이 미스터리 범죄가 일어나는 ‘밀실’ 역할을 톡톡히 하듯, <극락도 살인사건>의 배경인 극락도 역시 잇단 살인사건에서 주인공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속되는 죽음의 손길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제 범인은 뒷짐지고 구경만 해도 된다. 고립된 공간, 한정된 인물들 사이에서 의심이 불을 당기면 곧 목숨을 건 아귀다툼이 그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연이은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란 기본 골격 위에 의심으로 커져간 마을 사람들의 아귀다툼을 그려 넣는다. 극락도에서 차례로 죽어간 사람 가운데 ‘명백한’ 살인에 의한 시체는 별로 없다. 의심이 낳은 싸움에 의한 총질과 칼질, 발길질이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치밀한 미스터리 구도보다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의 뒤틀린 심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 <극락도 살인사건>은 그래서 미스터리 추리물의 매력에선 한 발 물러서 있다. 단서들을 조립해가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 안에선 빈틈이 들쑥날쑥 드러나고, 마을에 전해지는 ‘열녀문’에 관한 소문이 소복 입은 귀신으로 직접 인용된 장면들은 ‘복선’으로 작용하기는커녕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만 한다. 더욱이 범인의 실체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은 충분히 놀랍지만, 내레이션으로 친절히 밝히고 덧붙여 설명하는 사건의 뒷모습은 <극락도 살인사건>을 김빠진 싱거운 미스터리로 머물게 한다.
미스터리의 묘미는 약하지만 닫힌 공간 안에서 삶과 죽음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이 생생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건 모두 배우들의 완숙한 연기력 덕분이다. <살인의 추억>의 의뭉스런 사내 이후 또 다시 비밀이 가득한 보건소장을 연기한 박해일은 물론이고 성지루, 박원상, 최주봉, 안내상, 박솔미 등 열일곱 섬마을 주민 모두 제 몫의 빼어난 감정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에 대립과 긴장의 팽팽한 기운을 새겼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김한민 감독이 80년대 후반, 고향 순천에서 흘려 들었다는 한 섬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다.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장편 연출 데뷔한 김한민 감독이 이야기도 직접 썼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할리우드랜드> - LA Confidential
1959년 6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인기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Adventures of Superman>의 스타 배우 조지 리브스(벤 애플렉)가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다. 인기 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약혼자 레오노어 레몬(로빈 튜니)와 미국 전역의 수백만 팬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지만, LA 경찰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서둘러 종결짓는다. 그러나 조지 리브스의 어머니 헬렌 베솔로(로이스 스미스)는 아들의 죽음을 타살로 확신하고, 사립 탐정 루이스 시모(애드리안 브로디)를 고용하여 조지의 죽음을 조사하도록 한다.
조지 리브스. 1914년 미국 출생으로,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총 104편의 에피소드에 걸쳐 방영된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으로 전후 영웅을 갈망하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대 슈퍼맨으로 유명한 배우다. 조지 리브스는 <슈퍼맨의 모험>으로 전 미국의 슈퍼 히어로로 떠오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에게 드려진 슈퍼맨 코스튬은 정극 배우로 향하는 발목을 사사껀껀 잡는다. 어렵게 오디션을 통과하여 출연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 시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총알보다 빠른 사나이'라며 킥킥대고, 결국 그의 출연 분량은 모두 잘려 나가기에 이른다.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 <식스 피트 언더 Six Feet Under> <소프라노스 The Sopranos> 등 일련의 HBO TV 시리즈로 유명한 앨런 쿨터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할리우드랜드 Hollywoodland>는 조지 리브스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조지 리브스의 죽음을 조사하던 루이스 시모는 조지와 관련된 할리우드 쇼 비지니스의 추악한 현실에 직면한다. 애초 조지 리브스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루이스는 점차 그에게 일종의 동질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처럼 <할리우드랜드>는 루이스의 시점과 조지의 시점을 오가며, 추악한 진실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범죄 스릴러와 코미디 장르가 절묘하게 섞인 <소프라노스>처럼 <할리우드랜드>에서도 앨런 쿨터의 장기는 여전히 발휘된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는 조지 리브스의 죽음에 대해 섯부른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할리우드랜드>는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묘한 긴장감을 극에 부여한다. 애드리안 브로디, 벤 애플렉, 다이안 레인, 밥 호스킨스 등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중견 배우들의 호연은 영화에 확실하게 힘을 실어준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고스트 라이더> - 영화로 부활한 안티히어로, 악마와 맞서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자니 블레이즈(니콜라스 케이지).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인 그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피터 폰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자니 블레이즈의 곁을 끝없이 맴돌기 시작하고, 자니 블레이즈는 그 계약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임을 깨닫는다. 한편, 메피스토펠레스의 아들인 블랙하트(웨스 벤틀리)가 세 명의 타락천사를 데리고 세상에 나타난다. 그들의 목적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죽이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 메피스토펠리스는 자니 블레이즈에게 블랙하트 일당을 제거할 경우 영혼을 돌려주겠다고 속삭인다. 이제 자니 브레이즈는 밤마다 불멸의 영혼사냥꾼인 ‘고스트 라이더’로 변신해 타락천사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마블 코믹스의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고스트 라이더 Ghost Rider>는 악의 무리에 맞선 안티히어로 자니 블레이즈의 이야기다. 자니 블레이즈라는 캐릭터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는 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 Faust]를 연상시키며, 선과 악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와 닮아있다. 하지만 <배트맨 Batman>이나 <스파이더 맨 Spider-Man>에서 보여주었던 고뇌하는 안티히어로의 모습은 <고스트 라이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고스트 라이더>는 자신의 영혼을 되찾기 위해 악의 무리에 맞서는 자니 블레이즈의 여정 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권을 뚫고 비행기를 막아내는 <수퍼맨 리턴즈 Superman Returns>나 흑백화면 안에 다채로운 캐릭터의 향연을 담아냈던 <씬 시티 Sin City>에 비해 <고스트 라이더>는 시각적 쾌감이 강한 영화가 아니다. 여섯 개의 블랙호크 헬기 위를 뛰어넘는 자니 블레이즈의 스턴트 쇼엔 박진감이 떨어지며 고스트 라이더의 얼굴은 표정 없이 화염으로 이글거릴 뿐이다.
하지만 <고스트 라이더>는 영화 면면에 녹아난 상징을 읽을 때 쏠쏠한 재미가 있다. 고스트 라이더라는 캐릭터는 미국문화를 상징하는 카우보이와 똑 같다. 올가미는 쇠사슬로, 말은 모터사이클로 바뀌었을 뿐 가죽 자켓을 입고 악당을 처치하기 위해 내달리는 모습은 카우보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걸작 <이지 라이더 Easy Rider>(1969)에 출연한 피터 폰다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맡은 것도 괜한 설정이 아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즐거웠던 유년기 시절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니 블레이즈는 사탕과 젤리를 입에 물고 산다. 속죄와 구원, 천사와 악마 등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고스트 라이더>에 카펜터즈(목수)의 음악이 쓰이는 것은 하나의 농담처럼 보인다. <데어데블 Daredevil>의 마크 스티브 존슨이 <고스트 라이더>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천년학> - 한 많은 이복 남매의 사랑 이야기
이복 남매 동호(조재현)와 송화(오정해)는 소리꾼 양아버지 유봉(임진택)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살아간다. 소리를 하는 송화와 북 장단을 맞춰주는 동호는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혈기왕성한 동호는 아버지 유봉의 횡포와 이복 누나 송화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채 집을 나가버린다. 군대를 다녀오고 유랑극단의 멤버가 되어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동호는 유랑극단의 여배우 단심(오승은)의 유혹에 빠져 동거를 하지만, 언젠가 송화를 만날 날만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양아버지는 죽고 송화는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호는 송화를 찾아나선다.
영화는 중년의 동호가 어린 시절 양아버지와 누나 송화와 함께 가끔 머물렀던 선학동 주막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학동 주막은 송화에 대한 짝사랑으로 평생 주막을 지키며 살아가는 용택(류승룡)이 지키고 있다. 선학동 주막에서 재회한 두 남자는 서로 사랑했던 한 여자 송화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으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눈다.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들락날락하며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야했던 한 이복 남매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장대하게 펼쳐놓는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살지 못하는 이복 남매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자 평생 이름 한번 빛내보지 못한 무명 소리꾼들의 이야기다. 송화와 동호는 성공하지 못한 소리꾼 아버지에 의해 소리꾼으로 키워지지만 이들 역시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이름을 얻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다 스러져간다. 송화는 잔칫집과 술집을 전전하며 소리로 연명하는 처지지만 목소리를 갈고 닦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복 누나 송화의 소리에 북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일념으로 연습에 매진하는 동호 역시 고작 유랑극단 무대거나 기생들의 술자리에서 실력발휘를 할 뿐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와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100번째 영화라는 강박은 찾아보기 힘들다. 제작 중단과 주연 배우의 교체 등 진통을 겪은 흔적도 드러나지 않는다. 99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노감독의 여유는 롱샷으로 잡아낸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물을 자연의 일부로 품어내는 화면에서 묻어난다. 양방언의 애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풍경이 펼쳐지는 선학동의 해질녘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백미. <서편제>에서 송화로 출연했던 오정해가 14년 만에 다시 송화로 출연해 농익은 소리를 들려주며 <서편제>의 맥을 이었고, 개성 강한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조재현이 가슴에 한을 품은 떠돌이 고수 동호 역을 맡아 오정해와 호흡을 맞췄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사랑스런 대작 신파 코미디
못된 남자들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여자의 이야기는 그리 낯선 소재가 아니다. 한국 영화사에서도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영화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단순히 소재만 본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Memories of Matsuko>(이하 ‘마츠코’)은 일본판 ‘영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마츠코(松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송자의 여인잔혹사’라 해도 무방하다. <마츠코>의 시작은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쇼(에이타)는 아버지(카가와 테루유키)로부터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고모 마츠코(나카타니 미키)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말을 듣는다. 명함 한 장을 손에 꽉 쥔 채 강변의 잔디밭에서 53년의 삶을 마감한 마츠코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혐오스런 마츠코’라 불리며 생을 마감한 고모의 과거를 좇는 쇼와 파란만장한 마츠코의 일생이 교차되며 하나둘씩 비밀의 열쇠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 시점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츠코의 인생을 급변하게 만든 첫 번째 계기는 학생의 절도사건을 무마하려다 절도범으로 몰리면서 교직을 떠나야 했던 일이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동경하는 무명의 작가 지망생 야메가와(쿠도 칸쿠로)와 동거를 시작한 마츠코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 나간다. 야메가와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야메가와를 시기하던 친구 오카노와 불륜관계를 맺으나 아내에게 들킨 후 버림받기에 이른다. 매춘부가 된 마츠코는 업소의 최고 인기녀로 급부상하지만 동거하던 기둥서방 오노데라(다케다 신지)에게 배신당한 후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른다. 수사망을 피해 도쿄로 피신한 마츠코의 새로운 연인은 이발사 시미즈.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동거 중 체포돼 교도소로 수감된 마츠코는 8년의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후 시미지를 다시 찾아가지만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그를 멀리서 보고 낙담한 채 길을 떠난다. 마츠코 앞에 우연히 나타난 제자 류(이세야 유스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하며 외로운 마츠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츠코>는 비극이자 희극이 공존하는 묘한 작품이다. 로맨스와 뮤지컬이 판타지와 결합해 마치 CF 같기도 하고 뮤직비디오 같은 화려한 영상을 펼쳐 보인다.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는 오랜 CF 경력 끝에 <불량공주 모모코 Kamikaze Girls>로 데뷔해 일본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인물이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삶을 무겁게 그린 원작 소설을 판타지 같은 뮤지컬 로맨스로 변형시킨 나카시마 테츠야는 <불량공주 모모코>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하고 자극적인 색감과 미술, 세트, 현란한 편집 기법 등을 한 여자의 일대기와 접목시켜 한 편의 장대한 콜라주를 완성해 낸다. 특히 꽃으로 수놓은 화려한 색감의 판타지적 미장센과 뮤직비디오 같은 뮤지컬 장면은 <마츠코>의 가장 뚜렷한 외적 특징이다. <마츠코>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을 동시에 견지하며 눈물샘과 웃음보를 동시에 자극한다는 점 때문이다. 감독의 꼼꼼하고 집요한 연출력도 대단하지만 키네마준보 베스트10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나카타니 미키의 열연은 작품의 완성도를 배가시킨다. 일본 문화 애호가라면 나카타니 미키, 이세야 유스케, 다케다 신지 등 주요 출연진의 면면은 물론 시바사키 코우, 츠치야 안나, 작가 쿠도 칸쿠로, 가수 보니 핑크 등의 특별 출연도 반가울 듯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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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4월1주차 개봉영화
2007년 04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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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은 아일랜드 영화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와 감독, 배우가 손을 잡고 만든 작품답게 <플루토에서 아침을>에는 아일랜드의 풍경과 아일랜드 특유의 문화가 오롯이 녹아 있다. 아일랜드가 낳은 유명 감독 닐 조단은 아일랜드 출신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인 패트릭 멕카베와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97) 이후 두번째로 호흡을 맞췄고, 주인공 키튼 역에 킬리언 머피를 비롯, 연기력을 인정받는 아일랜드의 배우들이 가세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태어나자마자 성당 앞에 버려진 패트릭(킬리언 머피)은 엄격한 양어머니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성장한다. 자라면서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게 된 패트릭은 자신의 이름을 성정체성이 불분명했던 성녀의 이름인 키튼으로 바꾸고 여장을 하고 다닌다. 자신을 버리고 간 친엄마를 '유령 숙녀'라고 부르며 그리워하던 키튼은 어느날 친엄마가 런던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런던으로 향한다. 아일랜드 시골뜨기 키튼에게 런던은 정글이었다. 카바레 가수, 놀이공원의 광대, 마술사 보조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여러 남자들과 사랑하고 이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친엄마를 찾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친아버지인 시골 마을의 신부가 찾아와 키튼의 친엄마가 사실은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서 가정을 꾸린 채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1992년 작 <크라잉 게임 The Crying Game>에서 성정체성이 모호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도발적인 정치 문제를 풀어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닐 조단 감독이 오랜 만에 다시 여장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만들었다. <크라잉 게임> <마이클 콜린스 Michael Collins> 등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관심을 기울여 온 닐 조단 감독은 <플루토에서 아침을>에서 다시 한번 아일랜드의 과거 한 시점을 스크린에 되살려낸다. 우리가 흔히 '변태'라고 부르는 복장도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플루토에서 아침을>에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197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닐 조단 감독은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아일랜드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언제든지 테러 용의자로 몰릴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여장 남자, 피부색 등에 대한 사회, 문화적 편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묘사하지 않는 대신,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를 외치는 키튼 캐릭터를 내세워 경쾌한 톤으로 풀어낸다. 닐 조단 감독은 이처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키튼의 모습을 통해 긍정이야말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이라고 역설한다.
<28일 후... 28 Days>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선샤인 Sunshine> 등에서 열연한 킬리언 머피가 바보스러울 만치 긍정적인 인물 키튼을 마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쉰들러 리스트 Shindler's List>로 유명해진 아일랜드 배우 리암 니슨이 키튼의 친아버지인 인자하고 따뜻한 버나드 신부로 분한다. 이외에도 스티븐 레이, 브렌단 글리슨, 루스 네가, 로렌스 킨런 등 아일랜드 출신의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이 조연으로 참여해 완벽한 앙상블을 선보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4/5개봉작 리뷰] <우아한 세계> - 우아하지 않은 가장의 우아한 꿈
강인구(송강호)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있다. 아내(박지영)와 두 명의 자녀가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캐나다로 유학 간 아들의 학비를 걱정하고,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진 딸(김소은)의 학교 생활을 신경 써야 하며,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해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궁리를 해야 하는 대한민국 평균 가장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낮에는 정글 같은 직장 내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밤이 되면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대단한 성공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족을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일반적인 가장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업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직폭력배다. 아내와 딸이 혐오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리고 새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강인구는 어쩔 수 없이 조직에 몸담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 한 건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조직을 떠나려 하지만 조직 내의 라이벌(윤제문)은 그의 밥그릇마저 빼앗으려 한다. 칼에 찔리고 경찰서를 드나드는 남편이 지긋지긋해진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버린다. 위기에 몰린 가장 강인구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아한 세계>의 강인구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적자생존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과 정신을 혹사시켜야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여러모로 부족한 남편이고 아버지일 뿐이다. 가족과 함께 우아한 삶을 살고 싶어도 팍팍한 현실은 그의 목을 졸라온다. 조직폭력배라는 직업은 단지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인 은유일 뿐이다. 상징과 은유를 덜어 내면 강인구는 대한민국의 모든 가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여타 조폭 영화들과 분명하게 대립되는 부분이다. <우아한 세계>를 조폭 영화의 진화 혹은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조직폭력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묘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재림 감독은 강인구라는 인물을 통해 갱스터의 세계나 한국 중산층 가족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대신 그 속에 위치한 보편적인 의미의 한국 사회 가장을 응시한다. 지극히 1인층 시점을 유지하며 직장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인물의 현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우아한 세계>가 누아르인 것은 ‘OO파’, ‘OO파’ 같은 폭력조직들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자체의 생존논리가 거대한 갱스터 조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상황과 경쾌한 음악을 대조적으로 배치시키는 연출 방식에서 드러나듯 한재림 감독은 관객의 과도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기 위해 관습적인 장치 사용을 애써 피한다. 아이러니와 위트, 비극성을 공존시키며 따뜻한 인간 드라마를 완성해낸다. 휴먼 드라마는 결코 아니지만 누아르라는 장르적 특성에 비해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따뜻하다. <우아한 세계>의 장점은 적당한 거리두기에 있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피하지만 연민의 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된다. 커다란 집에 홀로 남은 강인구가 가족의 모습이 담긴 테이프를 보며 눈물 흘리다 그릇을 집어 던지는 장면은 주인공을 바라보는 연출자의 시선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최근 몇 년간 제작된 한국영화의 엔딩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이라 불릴 만한 이 신은 영화 속 주인공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압축해 담아내며 작품의 궁극적 메시지를 함축해 묘사한다. 단 하나의 장면으로 연기상을 수여한다면 송강호의 엔딩 신 명연을 0순위 후보로 올려야 할 것이다. 후반부로 접어들며 집중력을 잃는 작품의 단점을 한재림의 연출력과 송강호의 연기력이 완벽하게 결합된 엔딩 장면으로 만회한다. 한국 조폭 영화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아한 세계>는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작품들 중 하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5 개봉작 리뷰] <마하 2.6: 풀 스피드> - 실사촬영으로 담아낸 극한의 속도감
차세대 전투기 미라지 2000이 에어쇼 도중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최고의 공군 마르첼리(브누아 마지멜)와 발로아(클로비스 코르니악)는 미라지 2000을 찾으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수색작전에 돌입한다. 레이더 망을 피해 교묘하게 위장 비행하고 있던 미라지2000은 이들에게 발각되자 위협적인 태세를 취하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 발로아를 구하기 위해 마르첼리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미라지 2000을 격추시킨다. 부대로 복귀한 두 비행사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공군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이들의 실력을 눈여겨 본 전투기 판매상은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전투기를 다시 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하 2.6: 풀 스피드 Les Chevaliers du ciel>는 최신예 전투기가 선사하는 극한의 속도감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카레이서 출신이자 <택시 Taxi>의 연출을 맡았던 제라르 피레 감독은 <마하 2.6: 풀 스피드>에서 무대를 하늘로 옮기며 긴박감 넘치는 비행 대결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다. 역동적인 비행 신을 연출하기 위해 피레 감독은 실제 비행기에 특수 카메라를 달아 전투기를 뒤쫓으며 영화를 촬영했다.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되지 않은 <마하 2.6: 풀 스피드>의 비행 장면은 전투기의 미세한 떨림까지 고스란히 잡아내 사실감을 높이고, 구름을 뚫고 360도 회전하는 미라지 2000의 모습은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알프스 산맥에서 파리 시내까지 펼쳐지는 유려한 풍경 역시 <마하 2.6: 풀 스피드>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속도감 있는 영상에만 집중한 탓에 허술한 이야기 구조는 <마하 2.6: 풀 스피드>의 단점으로 작용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파일럿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으며, 차세대 전투기 미라지 2000을 둘러싼 음모 역시 설명 없이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또한 중동 테러집단의 방해만 없었다면 미국과의 비행 시합에서 무난하게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정은 프랑스 전투기 미라지 2000에 대한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5 개봉작 리뷰]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 - 극성 엄마, 딸의 연애코치가 되다
밀리(맨디 무어)는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 하지만 결혼은커녕 지금껏 제대로 된 연애도 한번 못해봤다. 어떻게 된 게 만나는 남자마다 게이 아니면 유부남, 그도 아니면 변태들이다. 하지만 밀리의 이 ‘저주 받은’ 연애사를 본인보다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아닌 밀리의 엄마 대프니 와일더(다이앤 키튼). 딸 셋을 혼자 힘으로 키워낸 억척엄마 대프니는 결혼해 잘 사는 두 딸과 달리 연애 젬병인 밀리가 걱정이 돼 밤잠을 설칠 지경이다. 자고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은 동서양 구분이 없는 법. 결국 대프니는 스스로 밀리의 애인을 찾기로 결심한다. 인터넷 사이트에 ‘애인구함’ 광고를 내고, 직접 면접을 거쳐 대프니가 낙점한 ‘미래 사위’는 건축가 제이슨(톰 에버렛 스콧). 이렇게 속 사정 전혀 모르는 밀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제이슨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밀리에게 또 다른 매력남 조니(가브리엘 매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밀리의 ‘양다리 연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제 ‘Because I Said So(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서 알 수 있듯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는 딸의 연애를 ‘내 맘대로’ 주무르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극성 엄마의 일기를 담고 있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딸의 감정까지 조정하려 드는 엄마 대프니와 딸 밀리의 좌충우돌이 코믹한 톤으로 펼쳐진다. 문제는 티격태격 코믹한 전반부의 영화 흐름이 모녀간의 이해와 화해, 모녀애로 발전하는 후반까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코믹한 상황 속에서 감동을 끌어내려는 ‘전형적인’ 드라마 공식이 투박하게 표현돼 결국 유쾌한 코미디도, 진한 모성애도 모두 빛 바랜 꼴이 되고 말았다.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현실 속 여자들이 한번쯤 고민해봤을 ‘조건 좋은 남자와 조건보다 마음이 끌리는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밀리의 양다리 연애다. 직업, 돈, 명예,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제이슨과 마음 맞는 건 많지만 여러 가지 ‘세부 조건’이 형편없는 조니 사이에서 갈등하는 밀리의 고민이 영화에 현실적인 색을 입힌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화가 새롭고 획기적인, ‘아찔한’ 결론을 찾았다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심’이란 ‘전형’에서 역시 영화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Cats & Dogs>을 통해 연애의 세심한 심리를 꿰뚫었던 마이클 레만 감독이 잡아낸 여성들의 연애 심리는 여전하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신선한 자극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 건 억척 엄마 대프니를 연기한 다이앤 키튼. 다이앤 키튼은 ‘참견’이 짜증이 아닌 애교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엄마를 훌륭히 표현해낸다. 그녀와 호흡을 맞춰 밀리를 연기한 맨디 무어도 영화에 귀엽고 발랄한 미소를 더했다. 드라마 <섹스 앤 시티 Sex and the City>의 사라 제시카 파커의 의상을 담당한 샤이 컨리프가 만들어낸 패션 스타일들은 여성 관객들을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 앞에 불러들이게 할 또 다른 요소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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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3월 마지막주, 개봉영화
2007년 03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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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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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산골마을 시골 총각 조춘삼(차승원)은 얼마 전 마을 이장이 됐다. ‘젊은 피’를 부르짖는 마을 어르신의 뜻에 따라 이장 자리에 오른 며칠 후, 군수 선거에서 또 다른 ‘젊은 피’가 선거 유세를 벌인다. 학창 시절, 반장 자리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춘삼의 빛에 가려 만년 부반장에 머문 노대규(유해진)가 그 주인공. 얼마 후 둘은 최연소 마을 이장과 최연소 군수로 다시 만난다. 여러모로 자존심이 밟힌 춘삼, 신임 군수 대규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기 시작한다. 하지만 춘삼과 대규의 ‘귀여운’ 티격태격은 곧 젊은 군수를 누르려는 군의 유지 백사장(변희봉)의 음모가 끼어들면서 큰 싸움으로 변화해 간다.
<이장과 군수>는 <재밌는 영화>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까지, 코미디 영화만을 고집스레 찍어온 장규성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오랜 세월 ‘웃음’을 연구해온 감독답게 <이장과 군수>에도 웃음이 넉넉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다 큰’ 어른 춘삼과 대규의 바닥을 바라보는 자존심 싸움은 유치하지만 충분히 재미있고, 자잘하게 흩뿌려진 코믹 에피소드들도 웃음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장규성 감독의 전작 <재밌는 영화>를 패러디 한 장면들을 배치해 재치를 더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초반엔 웃음, 후반엔 감동’이란 공식을 착하게 따르는 <이장과 군수>는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으로 웃기다가 중반을 넘어서며 급작스레 ‘우정’의 이름으로 이 둘의 싸움에 마침표를 찍는다. 영화 중반, 춘삼과 대규의 싸움이 가장 큰 폭으로 대립하고 폭발하는 사건으로 끌고 온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둘러싼 아웅다웅도 영화의 가벼운 웃음 톤을 흐트러트린다. 지역 발전을 위해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해야 한다는 군수 대규와 백사장의 사주를 받아 ‘별 뜻 없이’ 이에 반대 투쟁을 벌이는 춘삼의 대립은 얼핏 참여정부를 빗대어 풍자한 듯 보이지만 어설픈 수준에 머물고 곁가지로 끌고 들어온 공무원 비리 문제도 코미디 영화의 호흡을 무디게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잦은 회상 장면도 영화의 흐름을 방해한다.
<이장과 군수>를 가장 빛나게 하는 건 ‘이장’과 ‘군수’다. 이젠 어떤 코믹연기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차승원의 농익은 코믹 연기, 온 몸 던진 슬랩스틱이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과장된 행동으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이장’ 차승원과 달리 차분한 톤의 드라마를 끌고 가는 ‘군수’ 유해진의 감정 연기는 <이장과 군수>의 가장 큰 매력으로 뽑을 수 있을 만큼 ‘백미’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뷰티풀 선데이> - 삐뚤어진 사랑에 용서를 구합니다
강력반 소속 강형사(박용우)가 타락한다.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검은 돈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강형사는 아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청 내사과는 강형사의 비리를 눈치채고, 병상에 있는 아내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내성적인 성격의 고시생 민우(남궁민)는 우연히 만난 수연(민지혜)에 반해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저 멀리서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던 민우는 술에 취한 어느 날 우발적으로 수연을 겁탈한다. 몇 년 후 수연과 다시 만난 민우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그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민우와 수연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수연은 민우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뷰티풀 선데이>는 아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강형사의 이야기와 삐뚤어진 욕망을 숨긴채 살아가는 민우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랑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두 이야기는 서로 마주치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은채 나란히 진행되다가, 두 사람이 한 장소에 만나면서 이들을 둘러싼 비밀이 한꺼번에 공개된다. 그러나 허술하게 연결된 이야기 구조와 느닷없이 등장하는 플래쉬 백 장면 탓에 반전의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뷰티풀 선데이>의 또 하나의 문제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극도로 절제된 대사는 비열한 캐릭터인 민우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고, 강형사를 괴롭히는 조직폭력배들은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그려져 흡인력을 크게 떨어뜨린다. <뷰티풀 선데이>는 성폭행, 죄의식, 속죄라는 무거운 소재를 통해 원죄와 구원을 표현하려 했던 감독의 야심이 엿보이는 영화지만, 매끄럽지 않은 연출과 자연스럽지 못한 캐릭터 설정으로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박용우의 눈부신 호연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인간미를 잃고 서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우리학교> - 남북의 구분이 없는 학교
일본 내에는 현재 80여 개의 조선학교가 있다고 한다. 명칭이 조선학교인 것은 해방 직후 조국으로 건너가지 못한 조선인 1세들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비를 들여 만든 학교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재일동포들은 식민지 이전의 ‘조선’으로 국적이 변경됐고, 많은 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새로 취득한 반면 일부 동포들은 조선 국적을 고집한 채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조선학교가 일본 내에서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해방 후 한때는 540여 개에 달하던 조선학교는 일본 극우파 세력의 탄압 속에서 70퍼센트 가까이 자취를 감춰야 했다. 흔히 조선학교는 조총련계의 ‘북조선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일본인 특유의 한국어 억양과 북한식 한국어가 뒤섞인 말투도 그렇고 북한 관점의 역사 교육 등 여러모로 북한 친화적인 인상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해방 후 북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 충돌하며 이데올로기 문제로 비약된 탓이다. 조선학교는 엄밀히 말해 북조선학교라기보다는 민족학교라고 지칭하는 게 옳다.
조선학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는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의 1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감독은 3년 5개월 동안 혹가이도 조선학교에 머물며 교원, 학생들과 함께 지낸 일상을 1년의 촬영 분량에 담아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학교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소개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이 영화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는 학생들이 한국어로 수업을 받고 대화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낯선 풍경 속에 펼쳐진다. 일본 우익세력의 위협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학창 생활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교원들에게 감독은 보이지 않는 박수를 보낸다. 특히 감독이 동행할 수 없었던 북한 방문을 학생들이 직접 찍은 장면에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선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식이다. 교사와 학생이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 자율적으로 학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조선학교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람직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혹가이도조선학교 고교 3학년 학생들이 졸업식 때 흘리는 눈물 속에 아마도 그 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블랙북> - 점잖고 진지해진 폴 버호벤의 귀향작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네덜란드. 전쟁 전 독일 베를린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유태인 라헬(카리스 판 하우텐)은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독일군 치하에 있는 네덜란드 또한 안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국경을 넘도록 도와주겠다는 한 남자의 말을 믿고 돈을 준비해 간 라헬은 한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과 재회하지만 배를 타고 가던 중 독일군에게 발각돼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홀로 살아남은 라헬은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어 스파이 임무를 맡는다. 첫 번째 임무는 독일군 장교 문츠(세바스찬 코흐)를 유혹해 독일군 본부에 타이피스트로 취직하는 것이다.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던 라헬은 조금씩 문츠를 사랑하게 되고, 라헬의 정체를 눈치 챈 문츠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장교들의 파티가 있던 밤, 레지스탕스의 핵심 대원들은 라헬이 빼낸 정보를 활용해 구출 작전을 시도하지만 누군가의 배신으로 인해 한스(톰 호프만)와 일부 대원을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를 당한다. 반역자로 몰린 문츠와 함께 투옥된 라헬은 항변한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처형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폴 버호벤 감독이 <포스맨 De Vierde Man> 이후 23년 만에 네덜란드어로 연출한 <블랙북 Zwartboek>은 무려 20여 년에 걸쳐 구상된 작품이다. 아이디어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블랙북>은 40년 동안 묵혀 있던 작품이라 말할 수도 있다.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네덜란드 대학생들의 생존기를 그린 1977년작 <서바이벌 런 Soldaat van Oranje>을 준비할 당시부터 기획한 <블랙북>은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연달아 만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미뤄져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로 진출한 폴 버호벤은 살아남기 위해 상업적인 영화들을 계속 연출해야 했고, <할로우 맨 Hollw Man>을 찍고 난 2000년 후반에야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오래 전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700만 유로를 쏟아 부으며 역대 네덜란드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블랙북>은 촬영 도중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는 등 영화 내용만큼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은 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블랙북 Zwartboek>은 평범한 유태인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실제 사건들을 토대로 구성된 스토리이지만, 세부 내용들은 모두 허구다. 주인공인 라헬 역시 허구의 인물이다. <블랙북>이 여타 전쟁영화들과 다른 점은 역사와 운명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투쟁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주인공 라헬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돌파한다. 레지스탕스로 독일군과 싸우기도 하고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결국 살아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한다. 독일군과 레지스탕스의 대립이 영화의 주요 플롯이기는 하지만 <블랙북>의 인물들은 선악의 대립 대신 역사와 운명의 잔인한 굴레에 의해 움직인다. <블랙북>에는 여러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려 움직인다. 대체로 어드벤처의 성격을 띠지만 멜로드라마의 요소도 있고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는 무거운 메시지도 담겨 있다. 물론 전쟁영화에 필수적인 액션 장면도 있고 스릴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극적인 반전도 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감독의 연출력은 최근 그가 만든 할리우드 영화를 잊게 할 정도로 뛰어나다. 극적인 재미와 진지한 메시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블랙북>은 근래 폴 버호벤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점잖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혼돈의 역사를 뚫고 살아 남은 강한 의지의 여성을 부족함 없이 소화해낸 카리스 판 하우텐의 연기도 영화의 완성도에 일조했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블루프린트> - 인간 복제 시대에 탄생한 모녀의 사랑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이리스(프란카 포텐테)는 자신이 불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피아니스트로서 빛나는 자신의 삶이 덧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리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만은 살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에 이른다. 결국 그녀는 유전 공학의 선두주자인 피셔(울리히 톰센) 박사를 찾아가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다. 인류 최초의 복제 인간 시리(프란카 포텐테)는 그렇게 탄생된다. 시리는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이리스에게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키워진다. 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성과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피셔 박사는 이리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시리가 복제 인간임을 공개한다.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행복했던 시리와 이리스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글루미 썬데이 Gloomy Sunday - Ein Lied von Liebe und Tod>로 유명한 롤프 슈벨의 두 번째 장편영화 <블루프린트 Blueprint>는 독일 작가 샤를로테 케르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 복제가 실현된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인간 복제를 다룬 여느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블루프린트>는 프란카 포텐테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녀의 탁월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롤라 런 Run, Lola, Run>과 <본 아이덴티티 The Bourne Identity> 등에 출연했던 프란카 포텐테는 자신과 음악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어머니와 음악에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자신이 어머니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는 딸,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한다. 프란카 포텐테가 <블루프린트>의 일등공신이라면 음악은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답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어머니와 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관객들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말라노체> - My Own Private Oregon
미국 포틀랜드 변두리의 작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청년 월트(팀 스트리터)는 어느 날 조니(더그 쿠예트)라는 멕시코인 불법체류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조니는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다가 월트에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월트는 조니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만, 조니는 그에게 짖굳은 장난으로 일관한다. 결국 월트는 조니와의 뜨거운 하룻밤을 위해 조니의 친구인 로베르토(레이 몬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말라노체 Mala Noche>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엘리펀트 Elephant>의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다. 1987년 로스앤젤레스 비평가협회 독립영화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말라노체>는 미국에서 극장 상영도 되지 않았고,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아, 지금까지 오직 그 이름만이 영화팬들에게 알려졌을 뿐이다.(이전까지 거스 반 산트의 공식적인 장편 데뷔작은 맷 딜런, 켈리 린치 주연의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The Drugstore Cowboy>였다) <말라노체>는 작년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35mm 필름으로 특별 상영 형식으로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미국 포틀랜드에서 주로 활동하는 시인 월트 커티스의 동명 소설 원작의 <말라노체>는 다름 아닌, 거스 반 산트의 1991년작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의 원형이 된 작품. '나쁜 밤'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은 월트가 조니와 함께 보내는 하룻밤을 의미한다. 거친 흑백 화면 속에서 미국 서북부 황량한 포틀랜드 거리를 누비는 월트와 조니는 <아이다호>의 두 커플, 마이크(리버 피닉스)와 스콧(키애누 리브스)을 떠올리게 한다. <말라노체>가 대사와 드라마가 아닌, 침묵이 지배하는 몽환적인 영상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주류에 속하는 뉴라인시네마에서 제작된 <아이다호>와는 달리 저예산영화 <말라노체>가 당시로는 꽤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며 강도가 다소 센 퀴어시네마라는 점 정도가 <아이다호>와는 다른 점이다.
1만 달러가 넘지 않는 저예산의 제작비에,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배우들을 고용하여 제작된 탓에 <말라노체>의 외형적인 만듦새는 웰 메이드 영화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흑백과 컬러가 교차되는 화면들은 지나치게 거칠고,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간간히 어설프며, 사운드는 끽끽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거스 반 산트가 지난 2000년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끝으로 주류의 드라마투르기 영화가 아닌, <제리 Gerry>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Last Days>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에서 파격적인 실험으로 나아간 것을 기억할 것. <말라노체>는 2000년 이후 거스 반 산트 영화의 정신을 담은, 그의 놀라운 데뷔작이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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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와 태진(지진희)은 일란성 쌍둥이로 쏙 닮은 외모만큼 사이 좋은 형제다. 하지만 형제의 우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어린 시절, 굶주림에 지친 태수가 마약 조직 보스 구양원(문성근)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태수 대신 태진이 구양원에게 붙잡혀 갔기 때문이다. 판박이로 빼 닮은 얼굴과 달리 둘의 인생은 그렇게 엇갈린다. 그 후 19년. 그 사이 태수는 ‘해결사 수’란 이름의 청부살인업자로 자랐고, 구양원의 그늘 아래 자란 태진은 환경을 거스르며 경찰이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던 형제가 오랜 세월을 건너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날, 태진은 태수가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얹어 맞고 죽는다. 누가 태진을 죽였나? 그 비밀을 캐기 위해 태수는 스스로 태진이 돼 태진의 삶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태수의 이 지난한 복수극 안으로 구양원과 그의 조직원 점박이(오만석), 태진의 애인 강미나(강성연)와 해결사 ‘수’를 쫓는 부패 경찰 남달구(이기영)가 걸어 들어온다.
국내 관객에게 <피와 뼈 Blood and Bones>로 알려진 재일 한국인 감독 최양일은 일본영화계에서 ‘하드보일드영화라면 역시 최양일이 적임자다’라는 말을 듣는 인물이다. 그리고 <수>는 그런 최양일 감독의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영화다. 지하주차장을 지그재그로 오가는 자동차 폭주 신으로 시작해 칼과 일본 검, 쇠파이프와 총이 춤추는 가운데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액션 신으로 끝을 맺는 <수>는 영화 내내 ‘피범벅’ 액션을 선보인다. 여기에 ‘액션의 합’이란 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최양일 감독이 짜맞추는 액션은 ‘때린 데 또 때리고, 찌른 데 또 찌르는’ 피와 살, 그리고 뼈가 맞닿는 진짜 싸움이다. <수>를 가득 채운 이 ‘핏빛’ 액션은 영화의 장르를 결정짓는 요소인 동시에 영화의 주제를 이룬다. 태수는 자신의 잘못으로 조직 폭력배에게 끌려간 동생에 대한 ‘속죄 의식’을 칼에 찔리고 총을 얻어 맞는, 이 지루하고 힘든 싸움으로 대신한다. <수>는 동생을 죽인 이를 향한 잔인한 복수극인 동시에 살과 뼈를 깎으며 얻어낸 처절한 속죄 의식인 것이다. [키드갱]으로 유명한 만화가 신영우의 원작 만화 [더블 캐스팅]이 주인공을 영웅주의적으로 묘사했다면 최양일은 여기에서 영웅의 기개를 발라내고 나약한 인간을 가져다 놓았다.
눈알이 뽑히고 뇌수가 튀어나오는, 극단의 폭력 묘사가 <수>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허약한 드라마 줄기는 <수>의 가장 큰 단점이다. 동생에 대한 태수의 죄책감은 짐작하는 바지만 처절한 복수극을 끌고 갈 만큼의 충분한 정서적 공감은 끌어내지 못한다. 태진의 애인인 미나가 태수에 대해 보이는 ‘애증’의 감정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 태진의 죽음을 둘러싼 배후 인물들이 밝혀지는 과정의 단서들 역시 복선으로 쓰이기엔 어설픈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기존의 ‘젠틀’한 이미지를 벗어 던진 지진희는 과감한 액션 연기가 돋보이지만 해결사 수에 강한 카리스마를 입히는 덴 부족함이 엿보인다. <왕의 남자>에서 요염한 장녹수를 연기한 강성연은 의지가 강한 여경찰 강미나가 돼 남자 못지않은 강도 높은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여기에 마약 조직 보스를 연기한 문성근의 비열함이 관객을 소름 돋게 만든다. 뮤지컬과 TV 드라마를 종횡무진 하고 있는 오만석도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원의 ‘강단’을 완벽히 연기한다.
HOT 하드보일드, 하드고어 액션영화로서의 매력이 가득하다. ‘핏빛’ 향연을 꿈꾸는 관객에게 이보다 더 좋은 영화는 없다.
COLD 눈알이 뽑히고, 목울대로 끊임없이 피가 솟구쳐 나오는. 베고 자르고 찌르고 쏘는, ‘날 것’의 액션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은 살짝 속이 울렁일 수도 있겠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타인의 삶> - One & The Other
때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나라와 자신의 신념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원칙주의자 비밀경찰 비즐러(울리쉬 뮤흐)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 대신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에 감동받고 사랑을 느끼며, 이전의 삶과는 다른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은 동독 정부에 의한 국민의 인권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84년 겨울, 이야기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 체제가 망가질 즈음, 동독 정부는 이를 막아보고자 동독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끝없는 복종을 강요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전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하는 <타인의 삶>은 우익으로 낙인찍힌 극작가 게오그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악랄한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다. 여기서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최고의 도청 전문가로 손꼽히던 최고의 특수 경찰 비즐러는 국가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던 그런 원리원칙적인 사람이다. 지난 20년 동안 비즐러는 수백의, 아니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감시하고 도청해 왔지만, 그에게 그들은 철저히 타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국가에 해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부기해 왔다. 하지만 게오르그의 경우는 다르다. 게오르그를 도청하면서 비즐러는 더 이상 관찰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점차 게오르그의 일상과 대화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비즐러는 적극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게오르그의 책상에 놓여진 '브레히트 선집' 을 훔쳐 읽으며, 게오르그가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도청기를 통해 훔쳐 들으며 비즐러는 그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1973년생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장편 데뷔작 <타인의 삶>은 이처럼 우연히 엮인 관계로 인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풀어낸다. 러닝타임 137분을 계속 정공법으로 일관하는 탓에, 중반 이후 이야기의 종착점이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는 약점도 눈에 밟힌다. 그러나 세바스티안 코치와 마르티나 게덱 등 두 배우의 호연은 영화의 고루하고 따분함을 상쇄하고도 남으며, 특히 비즐러 역의 울리쉬 뮤흐의 연기는 실로 압권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는 <타인의 삶>을 통해 미니멀리즘의 연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배우다.
HOT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비롯 <타인의 삶>은 유수의 해외영화제와 시상식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또한 여전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극 중 이야기는 절대 남 이야기같지 않다.
COLD 언제나처럼 그렇듯 문제는 배급 규모. 또한 유럽 영화라면 보지도 않고 일찌감치 손사래를 치는 국내 관객들의 관람 성향도 흥행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넘버 23> - 숫자 놀이와 허황된 반전의 결합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세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모두 23개의 알파벳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1941년 12월 11일, 미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고, 히틀러는 1945년 4월에 자살했다. 12와 11을 더하면 23이 나오고, 1과 9, 4, 5, 4를 모두 더하면 23이 된다.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2001년 9월 11일의 숫자를 2+0+0+1+9+11로 계산하면 역시 23이 만들어진다. 살인마 찰스 맨슨은 11월 12일에 태어났고,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의 한니발이 나오는 데 모티브를 제공한 테드 번디는 1월 23일에 처형됐다. 고대 마야인들은 지구의 종말이 2012년 12월 23일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23의 숫자 놀이는 영화 <넘버 23 The Number 23>의 제작진들로 이어진다. 조엘 슈마허와 짐 캐리의 알파벳 글자수를 더하면 23이 나오고, 버지니아 매드슨과 짐 캐리를 더해도 23이 된다. <넘버 23>은 조엘 슈마허의 23번째 작품이다.
이 정도면 <넘버 23>이 어떤 영화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 23에 관한 편집증적 집착이 <넘버 23>을 관통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는 동물관리센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다. 생일인 2월 3일 개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한 후 월터는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한다. 생일선물로 아내(버지니아 매드슨)에게 받은 소설 [넘버 23]이 그 시작이다. 숫자 23의 저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소설 속 주인공인 핑거링(짐 캐리)과 자신의 삶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월터는 점점 편집증에 가까운 망상에 사로잡히고 자신을 둘러싼 숫자들이 온통 23으로 조합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 급기야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 믿게 된 월터는 부인을 살해하는 꿈까지 꾸게 된다. 월터가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소설 [넘버 23]에 숨어 있는 비밀을 추적하는 것이다. 소설의 작가 톱시 크레츠를 추적하던 월터는 소설 속 살인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살인사건을 일으킨 범죄자가 작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넘버 23>은 음모 이론이나 숫자 놀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미끼를 던지며 시작한다. 불길한 역사 속에 담긴 숫자 23의 예들이 나열된다. 단순한 숫자 놀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숫자로 23을 꿰어 맞추는 논리는 제법 흥미롭다. 숫자 23의 법칙에 흥미를 느낀다면 월터가 소설 [넘버 23]에 몰입해 가는 과정에 동화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뻔히 예견되는 결말의 반전이다. 영화의 소재와 달리 <넘버 23>은 결코 숫자 23과 연관된 수학적 추리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사건과 이를 비밀스런 반전으로 삼은 스릴러의 뻔한 트릭만 존재할 뿐이다. 짐 캐리와 버지니아 매드슨은 1인 2역을 하며 연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반전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댄 영화의 허술함 탓에 빛을 발하지 못한다. 조엘 슈마허 감독은 몽환적인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현실과 소설 속 이야기를 연결시키지만 이 또한 허황된 스토리 때문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그나마 이 영화를 최대한 즐기고 싶다면 결말 부분 직전에 극장에서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HOT 숫자 23의 법칙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처음으로 스릴러에 도전한 짐 캐리의 1인 2역 연기도 관심을 끌 만하다.
COLD 결말 부분의 허황된 반전이 극적 흥미를 잃게 한다.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도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향수> - 향을 보여드립니다
서른 넷에 한 극단의 제의로 쓴 희곡 [콘트라베이스]로 주목 받기 시작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는 1985년, ‘향기’에 미친 한 남자의 연쇄 살해극 [향수]를 출간한다. 뛰어난 후각의 소유자 ‘장 그르누이’가 향기를 찾아 연쇄 살인에 이르게 된 사연을 담은 이 책은 전세계 45개 언어로 번역돼 1,500만부의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다. <레지던트 이블 Resident Evil> 시리즈의 제작자 번드 아이킨거는 책이 출간된 해, [향수]를 영화로 옮길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드 아이킨거가 그를 설득해 판권을 구입하는 데 든 시간은 무려 15년. 이후 스탠리 큐브릭, 팀 버튼 등의 감독이 이 ‘향기 살인마’에 눈독을 들였지만 결국 연출은 <롤라 런 Lola Rennt>의 톰 튀크베어에게 맡겨졌다.
18세기 프랑스, 생선 비린내 가득한 시장통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맡은 냄새는 코를 찌르는 생선 냄새. 이렇게 태어난 사내아이는 세상 누구보다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다. 청년으로 자라난 장 그르누이(벤 위쇼)는 어느 날, 과일 바구니를 든 한 여인에게서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향기를 맡는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매혹적인 향을 경험한 그르누이. 그는 그 향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다니다 퇴물 향수 제조사 주세페 발디니(더스틴 호프만)와 만난다. 하지만 발디니의 향수 제조법도 그르누이의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르누이가 간직하고 싶은 향은 장미나 라벤더가 아닌, 살아있는 육체가 뿜어내는 향이기 때문이다. 결국 향을 간직할 방법을 찾아 ‘향수의 낙원’이라 불리는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로 향한 그르누이.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기를 얻기 위한 재료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세상 하나밖에 없는 그르누이의 ‘향수 컬렉션’이 쌓여가는 동안, 여인들은 차례 차례 주검으로 발견된다.
섬세하고 세밀한 언어로 향기를 기록한 소설 [향수]를 영화로 옮길 때 가장 큰 난관은 이야기의 소재인 향 그 자체였다. 시각 예술인 영화가 후각의 느낌을 담아내긴 쉽지 않은 법. 톰 튀크베어는 영화에 향을 새기기 위해 오히려 시각을 더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다. 구역질 나는 시장통의 비린내를 표현하기 위해 생선 내장을 늘어놓는 건 물론 구더기가 들끓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향수 한 방울의 향기를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꽃밭으로 뒤덮는다. 향기를 찾아나선 그르누이의 발길을 따라 장미와 라벤더가 피고 지는 사이, 관객은 자연스레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수많은 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영화 말미, 단두대에 올라선 그르누이가 여인들의 향으로 만든 향기를 퍼트리는 순간 <향수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의 탐미주의적 시선은 폭발한다. <향수>는 소설 속 문자가 만들어낸 '향기의 향연'을 옮겨내기 위해 향에 취한 750명 엑스트라를 '문자 그대로' 옷을 벗고 뒹굴게 한다. 이렇듯 <향수>는 문자로 그려진 모든 상상, 후각의 느낌까지 모조리 시각으로 빚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 <레이어 케이크 Layer Cake> 등에 출연한 신예배우 벤 위쇼가 장 그르누이의 절제된 감정 묘사를, 할리우드 중견배우 더스틴 호프만이 한물간 향수 제조사의 능청스런 표정 연기를 더해 <향수>를 시각적으로 더욱 즐겁게 만든다.
HOT 꼼꼼한 기록으로 재현해낸 18세기의 풍경, 꽃내 진한 향수 제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매력은 충분하다.
COLD 향수도 너무 짙으면 쉽게 질리는 법. 차고 넘치게 보여주는 영상미가 오히려 관객의 ‘상상’의 범위를 제한한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 달콤하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
정말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온 걸까? 그렇게까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걸까?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The Break-Up>(이하 '<브레이크 업>')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시카고에서 버스 관광 가이드를 하는 게리(빈스 본)와 브룩(제니퍼 애니스톤)은 사귄 지 2년 된 커플. 게리가 야구장에서 만난 브룩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쳐 연인이 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모습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를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게리와 브룩의 말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브룩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는 지경에 이른다. 서로 구할 집을 찾는 동안 어색한 동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만 그마저도 서로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브레이크 업>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주로 그리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사랑이 시작된 후에 초첨을 맞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연애할 때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던 서로의 단점들이 함께 살면서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행동과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처럼 <브레이크 업>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연애 시절 이야기 대신 함께 생활하게 된 연인이 상대방의 단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가 사랑이 끝나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라고 주장한다.
<브레이크 업>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게리와 브룩이 서로 오해하며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브링 잇 온>의 페이튼 리드 감독은 실제 커플들의 인터뷰를 통해 완성한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를 생생하게 스크린에 옮겨냈다. 코미디연기에 재능을 보여온 빈스 본과 '브래드 피트의 여자'로 더 유명세를 탔던 제니퍼 애니스톤의 실감나는 연기는 영화에 활력을 더한다.
HOT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놓는다.
COLD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은 시종일관 다툼으로 일관하는 연인들의 이야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빼꼼의 머그잔 여행> - 온몸으로 웃기는 애니메이션
겁 많은 어린 아이 베베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세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거대한 머그잔을 불러오는 신비한 힘을 지닌 마법 펜던트를 선물로 받는다. 마법 펜던트에서 튀어나온 머그잔이 베베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북극. 베베는 그곳에서 말썽꾸러기 곰 빼꼼과 미녀 펭귄 도도, 신사 펭귄 꽁꽁을 만난다. 빼꼼과 꽁꽁은 도도를 놓고 사랑 싸움을 벌이는 라이벌이라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다. 춥고 낯선 북극에 도착한 베베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마법 펜던트는 베베와 일당들을 계속 엉뚱한 곳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사막에서 만난 멋쟁이 도마뱀 후다닥이 이들의 세계여행에 합세하면서 베베의 여정은 끝이 없어 보인다.
EBS와 투니버스에서 방영 중인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빼꼼>을 영화화한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3세에서 8세 사이의 어린이들을 타깃으로 한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모든 캐릭터들은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 그리고 단순한 효과음 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 베베는 표정 만으로도 절박함이 담겨있고, 미녀 펭귄 도도를 향한 빼꼼과 꽁꽁의 좌충우돌한 몸짓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3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빼꼼>을 대사가 전혀 없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옮기기엔 영화의 호흡이 다소 길어 보인다. 말 없는 머쓱한 상황을 보완하는 것은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완성도 높은 컴퓨터 그래픽. 빼꼼이 낙하산을 메고 하늘에서 활공하는 장면이나 마법 펜던트를 놓고 지하 동굴에서 벌어지는 승부는 긴장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100% 국내 기술로 만들어 진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일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HOT 대사 없이 진행되는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위트는 하나의 언어가 되어 신선한 웃음을 제공한다.
COLD 각 에피소드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슬랩스틱 류의 단발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빼꼼의 머그잔 여행>에 단점으로 작용한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내 여자의 남자친구> - 연애의 달인과 내숭 100단이 만났다
방송국 PD인 석호(최원영)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연애의 달인이다. 석호의 이번 데이트 상대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여대생 채영(김푸른). 석호는 특유의 자상함과 아낌없는 금전봉사로 채영을 보살피지만, 그의 본심은 그저 채영과의 하룻밤이다. 석호는 이리저리 작업을 걸어본다. 스킨십도 강도를 올려보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모텔에 차를 세워보지만 채영에게 돌아오는 말은 “미쳤어?” 한마디. 살갑지 않은 채영의 반응에 석호의 불만이 나날이 쌓여만 간다. 한편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할 만큼 능력있는 사진작가 지연(고다미)은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선수(이정우)와 원나잇 스탠드를 나눌 만큼 대담한 연애를 지향한다. 하지만 지연은 예전부터 만나오던 석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끼고 이들의 관계는 조금씩 복잡해져 간다.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얽혀있는 연애의 속사정을 하나씩 풀어가는 영화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Pulp Fiction>과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의 이야기 구조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박성범 감독은 피와 대사의 향연 대신 섹스로 얽힌 이들의 연애담을 나열해 놓는다. 그러나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펄프 픽션>과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같은 치밀한 구성의 영화가 아니다.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서술되며 이들의 실체를 풀어갈 뿐이며, 남녀의 알콩달콩한 연애심리를 잡아냈던 영화 초반에 비해 영화의 후반은 질펀한 섹스 신으로 채워진다. 그 결과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두터워지지만 오히려 깊이는 후반으로 갈수록 얕아진다.
하지만 <내 여자의 남자친구>의 주연배우들은 개성강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낸다. 석호 역을 맡은 최원영의 능청스런 연기가 단연 압권이며, 청순가련과 내숭을 오가는 김푸른의 호연도 돋보인다. '현대생활백수'로 유명한 개그맨 고혜성이 연애와 담쌓고 지내는 어수룩한 영수 역을 맡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HOT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뤄진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다양한 연애의 유형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있는 작품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가는 이들의 연애담에 결말을 예측해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재미.
COLD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나선 작품이지만 원나잇 스탠드 같은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다룬 만큼 잔잔히 울려 퍼지는 감동은 적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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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2월22일, 개봉영화 리뷰
안녕하세요?
설연휴 가족과 함께 잘 보내고 오셨나요?
저는 너무 잘 보냈는지 살이1키로 쪘더라구요 ^^;
영화도 보고, 엄마,아빠랑 술도 한잔하고, 대구 수목원에 봄소풍도 다녀왔답니다.
모처럼의 휴식 덕분에 몸도, 마음도 리프레시가 되었답니다.
오늘, 월요일 같은 수요일,
개봉 영화 리뷰 해야죠?
이번주는 또 어떤 영화가 개봉을 하나요?
저는 드림걸즈가 가장 기대가 됩니다.
마강호텔은 이제 그만 해도 되는 조폭시리즈라 기대가 안되는게 사실이고
바벨은 예고편을 몇번 봤지만, 조금 작품성이 있는 영화지만 브레드 피트가 주연이라는 사실~ㅋ
그리고, 공포를 즐기신다면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추천드립니다...
^^*
그럼 수,목,금 3일은 가뿐하게 보내볼까요?
-Aurora-
2007년 0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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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의 한 신인가수 경연대회, 뒤늦게 참석한 여성 3인조 그룹 ‘드리메츠’는 청중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지만 결국 고배를 마시고 만다. 드리메츠의 멤버 디나(비욘세 놀즈), 에피(제니퍼 허드슨), 로렐(애니카 노니 로즈)은 낙담한 채 고개를 떨구지만 막 쇼 비즈니스의 세계에 뛰어든 자동차 세일즈맨 겸 매니저 커티스(제이미 폭스)의 눈에 들어 데뷔의 기회를 잡게 된다. 커티스는 드리메츠를 최고의 인기 가수 제임스 썬더 얼리(에디 머피)의 백보컬로 투입해 경험을 쌓게 하며 정식으로 데뷔시킬 기회를 노린다. 커티스의 목표는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것. 이를 위해 그는 드리메츠를 드림즈로 개명하고 리드 보컬 자리에 에피 대신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디나를 세운다. 드림즈는 스타덤에 오르지만 팀 내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간다. 에피는 커티스의 처사에 분개해 녹음과 공연 일정에 불참하는 등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디나와 사랑에 빠진 커티스는 자꾸 문제를 일으키는 에피를 방출하는 대신 새로운 멤버를 영입해 드림즈를 이어간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로 옮긴 <드림걸즈 Dreamgirls>는 단순히 무명가수의 성공기를 그린 시끌벅적 뮤지컬이 아니다. <드림걸즈>는 성공의 달콤한 매혹을 그리는 한편 그 이면에 숨겨진 냉정한 상업 논리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재능과 타협의 상관관계까지 면밀히 들여다 본다. 디나 존스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지만 뛰어난 외모를 가진 덕에 스타덤에 오르고, 에피 화이트는 뚱뚱하고 평범한 외모를 지닌 탓에 탁월한 노래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패배자가 된다. 뮤지컬 <드림걸즈>가 초연된 지 26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쇼 비즈니스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그 속의 인물들이 현실과 이상 속에서 갈등하고 싸우는 드라마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드림걸즈>의 초반은 1960년대의 대중음악을 무대로 옮긴 화려한 쇼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고, 극의 후반은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관객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시각적인 자극과 극적 흥미를 적재적소에 배치시킨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옮겨온 덕분이다.
<드림걸즈>는 전설적인 흑인 여성그룹 수프림즈를 모델로 제작된 가상의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 이야기에 근거한 시나리오는 재능과 열정, 성공과 좌절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성공의 중심에서 배척당한 재능 있는 그룹 내 멤버의 비극적인 최후를 멤버들 사이의 감동적인 화해로 바꿔 결말을 매끈하게 완결짓긴 했지만, 디나 존스의 성공과 에피 화이트의 실패는 <드림걸즈>에 극적 활력을 불어넣는 첫 번째 요소다. 비욘세의 존재가 밀릴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과 가창력을 자랑하는 제니퍼 허드슨은 <드림걸즈>를 빛나게 하는 첫 번째 주인공이다. 원작의 작곡가였던 헨리 크리거의 역동적인 노래들과 아웃캐스트, 블랙 아이드 피스, 윌 스미스 등의 안무를 담당했던 파티마 로빈슨의 화려한 안무, <시카고 Chicago>의 시나리오를 쓰고 <갓 앤 몬스터 Gods and Monsters> <킨제이 보고서 Kinsey>의 각본과 연출을 담당했던 빌 콘돈의 안정된 연출력 역시 뮤지컬 <드림걸즈>가 훌륭한 영화로 다시 탄생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HOT 1960년대의 쇼 무대를 현대식으로 재현한 화려한 장면 연출과 제니퍼 허드슨의 뛰어난 연기는 단연 압권.
COLD 1960년대 스타일의 흑인 R&B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작품에 대한 호감도는 떨어질 듯.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2/22 개봉작 리뷰] <바벨> - 닫힌 세상, 소통은 가능할까?
모든 것은 총 한 자루로 시작됐다. 모로코 사막지대, 염소 떼를 돌보는 가족은 어느 날 총 한 자루를 손에 넣는다. 염소를 노리는 자칼을 위협하기 위한 것이지만 두 아들에게 총은 그저 신기한 장난감일 뿐이다. 총으로 표적 맞추기 놀이를 하던 이들의 레이더 망에 걸려든 건 버스 한 대. 하지만 총알이 버스에 타고 있던 미국 관광객 수잔(케이트 블란쳇)의 어깨를 통과하는 순간, 놀이는 끝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잔은 남편 리차드(브래드 피트)와 모로코 여행 중이다. 이들이 낯선 땅에서 알 수 없는 ‘괴한’에게 습격 당한 동안, 미국에 있는 이들의 멕시코 가정부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는 마음이 초조하다. 아들 결혼식을 위해 고향으로 가야 하지만 부모 없는 꼬마들을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결국 그녀는 주인집 두 꼬마를 데리고 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한편 지구 반대편 일본엔 총의 원래 주인이었던 야스지로(야쿠쇼 코지)가 청각장애를 지닌 딸 치에코(키쿠치 린코)와 단둘이 살고 있다.
한 발의 총성에서 시작하지만 <바벨 Babel>의 총알이 꿰뚫는 이야기는 방대하다. 모로코 사막에서 시작된 사건은 갈래를 펼쳐가며 각기 다른 네 가지 이야기로 확장된다.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 Amores Perros>와 <21그램 21 Grams>을 통해 일관된 이야기 줄기 대신 서로 다른 시점,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바벨>에서도 각각의 에피소드를 쪼개고, 포개며 이야기를 엮는 방법을 택했다. 공간은 더 확장됐다. 모로코와 미국, 멕시코와 일본을 <바벨> 아래 모두 모아 두었다. 그리고 청각장애자 치에코의 ‘수화’를 포함한 영화의 각기 다른 다섯 언어는 <바벨>이 그리는 소통과 단절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창세기 ‘바벨탑’ 이야기에서 그대로 따온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바벨>은 ‘소통’의 문제에 집중한다. 이는 가족과 또래에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치에코가 타인과의 교감을 간절히 바라는 것과 같은 개인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때론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가로놓인 국가 간, 인종 간의 문제로 거듭나기도 한다. 여기에 중동 지역과 미국의 관계가 섞여 들면 더욱 복잡해진다. 모로코에서 미국 관광객을 향해 당겨진 총알은 결코 ‘테러’의 범위 밖으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비롭게 빛나던 미지의 여행지는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잠재적 테러의 공간으로 뒤바뀐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과 중동의 관계, 멕시코인을 대하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 도쿄의 휘황찬란한 마천루 아래 웅크린 개인의 모습까지 <바벨>은 '지금 이 시대'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의 파편들을 통해 <바벨>은 소외와 단절이 언어 이전에, 타인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 깃들어 있음을 에둘러 이야기한다.
여러 나라를 잇는 다국적 프로젝트인 만큼 <바벨>을 채우고 있는 배우들은 면면도 화려하다. 우선 할리우드에서 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이 부부 역으로 동참했다. 이냐리투 감독의 전작 <아모레스 페로스>에 함께 한 '이냐리투 사단'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과 아드리아나 바라자가 멕시코 대표로 나섰고, 일본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와 끼 많은 신예 배우 키쿠치 린코가 함께 했다. 여기에 다코타 패닝의 여동생 엘르 패닝도 귀여운 미소를 보탰다. 제작진 또한 든든하다. <아모레스 페로스> <21그램>의 시나리오를 쓴 기예르모 아리아가가 각본을,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의 로드리고 프리에토가 촬영을 맡았고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구스타보 산타올랄라가 입힌 음악 선율도 아름답다. 유능한 제작진과 배우가 손을 맞잡은 덕에 '상복'도 많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바벨>은 2007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따낸 것은 물론, 오는 25일 열리는 제79회 아카데미시상식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총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상태다.
HOT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이 입모아 "좋은 영화"라고 칭찬이다. '킬링 타임용' 영화에 질렸다면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편, 만나보는 것도 좋다.
COLD 아카데미시상식 결과에 따라 국내 흥행도 영향을 받을 듯. 최우수 작품상은 탐나지만 솔직히 영화제가 인정한 영화에 국내 관객은 인색하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2/22 개봉작 리뷰] <마강호텔> - 일자리 잃은 조폭들, 호텔리어 되다
조폭 중간 보스 대행(김석훈)은 조직 간의 인수합병으로 정리해고를 당한다. 졸지에 실직자가 된 대행이 일터로 복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강호텔이 조직에 빚지고 있는 돈을 받아오는 것뿐. 대행은 부하 두 명과 함께 지방에 위치한 마강호텔로 내려간다. 대행 일당은 조폭 특유의 단순무식한 영업방해 작전으로 미수금을 받아내려 하지만, 마강호텔 여사장 민아(김성은)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일은 쉽게 진행되지 않는다. 호텔 지배인 중건(우현)과 연변 출신 웨이트리스 정은(박희진)까지 가세해 대행의 일을 방해하면서 일은 점점 꼬여간다. 그러던 어느날 손님이라고는 통 들지 않던 마강호텔에 한 무리의 손님이 밀어닥치자 대행 일당은 엉겁결에 호텔리어로 변신,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마강호텔>은 <엽기적인 그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조감독을 거친 최성철 감독의 데뷔작이다. 영화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조폭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기존 조폭영화의 틀을 깨고 조폭들도 샐러리맨들과 마찬가지로 조직의 사정이 어려워지면 정리해고 당할 수 있다는 설정에서 출발, 색다른 코미디를 추구한다. <마강호텔>은 조직에서 떨려난 대행 일당의 처참한 상황과 이들이 미수금을 받으러 내려간 마강호텔에서 벌이는 좌충우돌을 묘사함으로써 의리가 아닌 생존을 위해 일하는 조폭들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는다. 감독은 의리가 아닌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조폭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아이러니한 웃음을 이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마강호텔>의 장점은 거기까지다. 참신한 아이디어는 빈약한 캐릭터와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헤맨다.
배우들의 연기는 무난한 편이다. 반듯하고 신사적인 이미지의 김석훈이 건달 대행 역을 맡아 뽀글뽀글한 파마머리에 촌스러운 꽃남방을 입은 망가진 모습으로 웃음을 이끌어내고, 탤런트 출신 김성은이 호텔 여사장 민아로 분해 조폭과 당당하게 맞서는 당찬 여성의 이미지에 코믹함을 덧입힌다. <안녕, 프란체스카>의 '안성댁' 박희진이 연변 출신의 웨이트리스 역을, 우현이 위기 때마다 가스통을 들고 나타나 위협하는 괴짜 지배인 중건 역을 맡아 감초연기를 선보인다. 그룹 솔리드 출신의 김조한이 음악감독으로 가세, 코미디에 걸맞는 신나고 유쾌한 음악을 더한다.
HOT 조폭들도 정리해고 당한다는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김석훈, 김성은, 박희진, 우현 등의 배우들의 연기도 무난하다.
COLD 기존 조폭코미디와 별반 차이없는 이야기 구조는 조폭코미디에 식상한 관객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주기에는 역부족.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2/22 개봉작 리뷰]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0> - 텍사스 살인마의 무한살육이 다시 시작된다
미국 텍사스 주의 한 마을, 한 아이가 흉측하게 생겼다는 이유 하나로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이후 이 아이는 살인마 가족에 의해 발견돼 무시무시한 살인마로 키워진다.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하고 그 인육을 먹어 치우는 이 기괴한 가족에게 사람의 감정이란 찾아볼 수 없다. 한편, 베트남 참전을 앞둔 에릭(매튜 보머)과 딘(테일러 핸들리) 형제는 각자의 애인 크리시(조나단 브루스터)와 베일리(디오라 베어드)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 텍사스를 지나던 이들에게 돈을 노리는 폭주족이 접근하고 결국 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교통사고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람을 먹는 식인 가족과 전기톱으로 사람을 학살하는 살인마였다.
1973년 미국 텍사스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전기톱을 든 살인마의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은 바로 다음 해 토브 후퍼 감독에 의해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The Texas Chain Saw Massacre>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됐다. 공포영화의 걸작으로 단숨에 자리매김한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은 실제 사건 발생 30년 후인 2003년 마커스 니스펠 감독에 의해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The Texas Chainsaw Massacre>으로 리메이크 돼 텍사스 살인마의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0 The Texas Chainsaw Massacre: The Beginning>는 2003년 작품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프리퀄로, 텍사스 살인마의 출생배경과 성장과정 그리고 그가 처음 살인을 시작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 0>은 잠시도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공포 영화의 규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텍사스 살인마와 그 가족들이 행하는 살육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지만, 에릭과 딘이 보내는 평온한 나날에서도 서서히 관객의 목을 죄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영화 내내 존재하는 공포 영화의 장치 탓에 텍사스 살인마의 출생과 성장 과정이 심도 있게 설명되지는 못한다. 감독 조나단 리브스만의 거침없는 폭력 연출은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잔혹한 공포감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는 데 그치고 만다.
HOT 원작과 리메이크의 성공에 힘입어 새로 부활한 작품이다. 텍사스 살인마 레더페이스의 이야기 만으로도 호러 영화 팬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COLD 산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고, 전기톱으로 사람을 두동강 내는 등 폭력의 수위가 상당하다. 강도 높은 폭력성이 부담감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2/22 개봉작 리뷰] <태양의 노래> -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사랑의 노래
태양을 볼 수 없는 소녀가 있다. 일본의 조그만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카오루(유이)는 햇빛에 노출되면 죽게 되는 색소성 건피증이라는 희귀질환을 앓고 있는 소녀. 그녀는 햇빛을 피해 밤과 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 친구들과 같이 낮에 학교도 가지 못하는 카오루의 유일한 낙은 새벽녘 창문 너머로 짝사랑하는 코지(츠카모토 타카시)를 훔쳐보고, 해가 지면 기타를 들고 나가 자신이 만든 노래를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태양 아래에서 서핑을 즐기던 코지가 어느 날 밤 카오루의 노래를 듣고 반하면서 카오루와 코지의 애틋한 사랑이 시작된다.
<태양의 노래 Midnight Sun>는 색소성 건피증이라는 불치병을 앓는 소녀의 사랑이야기다.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열여섯 꿈많은 소녀 카오루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준 코지를 통해 삶의 기쁨을 알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카오루는 창문을 통해 멀리서 서핑하는 코지를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그의 인간됨과 매력에 푹 빠지고, 코지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카오루의 음악성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카오루에게 빠져든다. <태양의 노래>로 데뷔하는 신인감독 코이즈미 노리히로는 영화를 불치병에 걸린 소녀의 불행한 이야기로 풀어내지 않는다. 감독은 음악과 가족, 남자친구 코지와 함께 하는 행복한 순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짧은 생을 살다가는 카오루의 삶을 아름답고 희망적으로 그려낸다. <태양의 노래>는 유이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아름다운 노래가 감각적인 영상과 어우러져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을 준다.
카오루 역을 맡은 유이는 실제 일본 음악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1987년생의 싱어송라이터다. <From Me To You>
HOT 색소성 건피증이란 어두운 소재가 카오루와 코지의 사랑을 그리는데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태양의 노래>는 불치병을 다룬 이야기지만 신파로 흘러가지 않는 구성 탓에 부담 없이 관람할 수 있는 작품이다.
COLD <태양의 노래>는 일본 음악계의 신예 유이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지만, 유이는 아직까지 한국 관객에게 생소한 가수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2/22 개봉작 리뷰] <포도나무를 베어라> - 사랑과 용서, 구원에 관한 멜로드라마
신학대학교 학생으로 성직자가 되기를 꿈꾸는 수현(서장원)은 여자친구 수아(이민정)와 헤어지고 마음을 다잡으려 한다. 하지만 수아로부터 배달돼 온 청첩장은 그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학교 동기인 강우가 신학교를 그만두자 수현의 마음은 다시 한 번 흔들리기 시작한다. 고민에 휩싸인 수현에게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화가 오고, 수현은 오랜만에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다. 학교로 돌아가던 중 기차역에서 수아와 닮은 여자를 발견한 이후 수현의 고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신학교를 그만둘 작정으로 학장신부에게 마음을 털어놓은 수현은 수도원 피정을 권유 받고 외딴 시골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향한다. 수도원에서 새로운 마음을 다잡으려 하는 수현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뒤흔드는 인물은 수아를 닮은 헬레나 수녀. 갑자기 앓아 눕게 된 헬레나 수녀는 수현에게 도움을 청하며 수현을 혼란에 빠뜨린다.
성경의 요한복음 15장 5절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에서 흔히 ‘포도나무’는 하느님을 상징한다. 그렇다고 ‘포도나무를 베어라’라는 제목이 하느님을 베어 내라는 의미는 아니다. 데뷔작 <벌이 날다>로 주목받은 후 두 번째 영화 <괜찮아 울지마>를 내놓고 5년 만에 새 영화를 완성한 민병훈 감독은 작품의 제목이 ‘하느님을 온전히 믿기 위해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을 베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신학교를 그만두려는 수현이나 술을 끊지 못하는 문 신부(기주봉)는 두려움을 안고 살지만 그것을 베어내지 못하는 인물들이다. 신학생 수현이 겪는 세속적인 사랑과 종교적인 신념 사이의 고뇌는 결국 인간적인 고민과 영혼의 성장, 용서와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엄숙주의로 빠진 가톨릭 지도부에 대한 비판과 종교 사이의 장벽을 넘어선 보편적인 사랑에 대한 예찬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단순한 종교영화가 아니라 구원에 관한 진지한 멜로드라마인 셈이다.
HOT 감독은 현학적인 상징이나 기교를 배제한 채 철저하게 인물의 내면을 파고드는 서사구조로 극을 진행시킨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서장원은 신학생의 미묘한 내적 갈등을 섬세한 연기로 풀어내며 영화적 완성도를 끌어올린다.
COLD 상업영화의 자극적인 재미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관객과 소통하기 힘든 난해한 화법을 구사하지는 않지만, 외적인 사건보다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야기에 몰입하기 쉽지 않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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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2월2주, 개봉영화 리뷰~
언제나 찾아오는 수요일 아침입니다. 새해라서 그런지, 여기저기 자기 길을 가겠다고 퇴사하는 이들이 제 주위에 많이 있답니다. 힘든마음 독서와 함께 다시 내애인이 되어버린 소주와 함께 달래고 있답니다. ㅎㅎ 어제 밤 꿈엔 응아 하는 꿈을 꿨답니다. 그래도 퇴근길, 로또 사는건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 히힛^^* 이번주 개봉영화중 맘에 드는 작품 있나요? 수욜만 되면 왠지 주말 계획을 세워야만 할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생각만 많으면 꼭 집에서 구르기를 하게 되죠 ^^* 즐거운 주말계획 생각해보시구요, 오늘도 신나는 하루 보내세요 ~ Aurora. 2007년 02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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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좋은 늦여름, 데이트하기 좋은 화창한 날이다.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꾸리고 있는 두 유부녀의 삶은 대기를 가르는 바람처럼 산뜻하고 자유롭다. 서로 면식이 없는 두 유부녀는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남자와 연애를 시작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인터넷 채팅 아이디로만 등장한다. 대담하고 당당하며 발랄한 ‘이슬’(김혜수)은 대학교 2학년생인 ‘대학생’(이민기)과 처음 만나 직설적인 대화를 나눈 후 바로 모텔 침대로 뛰어든다. 10년 이상 차이 나는 남자를 리드하는 테크닉은 여유롭기만 하다. 내숭과 엉뚱함으로 똘똘 뭉친 ‘작은새’(윤진서)도 섹스만 밝히는 증권회사 샐러리맨 ‘여우두마리’(이종혁)와 바로 모텔로 직행한다. 하지만 작은새에게 섹스를 위한 섹스는 무의미하다. 그녀는 온갖 핑계를 대며 여우두마리의 저돌적인 공세를 뿌리친다. 같은 시간, 같은 모텔에서 ‘작업’ 중인 두 유부녀의 연애 방식은 전혀 다르다. 직설적이고 화끈한 이슬은 노련하게 대학생과의 잠자리를 끝마치고, 작은새는 수줍은 척 여우두마리의 손길을 거부한다.
<바람피기 좋은 날>은 순진하지만 밝히는 대학생에서 수줍은 젊은 유부녀, 프로급 바람둥이, 대담하고 자유분방한 유부녀까지 네 명의 연애 선수들이 밀고 당기는 불륜 게임을 그린다. 게임 내용은 단순하다. 이슬과 대학생은 신나게 섹스를 즐기다 작은새의 남편인 경찰과 함께 들이닥친 이슬의 남편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이르고, 작은새와 여우두마리는 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섹스 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이슬-대학생 커플은 심각하지 않고, 작은새-여우두마리는 코믹하기만 하다. 작은새가 섹스를 거부하는 방식이 특히 코믹하다. 처음엔 콘돔이 없다는 이유로, 다음에는 콘돔이 중국제라는 이유로, 다음에는 술이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는 이야기가 없다는 이유로 여우두마리의 손길을 뿌리친다. 어떻게든 골을 넣어보려는 여우두마리의 어수룩한 저돌성은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어느 정도 관계가 친밀해지자 이번에는 작은새의 엉뚱한 공세가 여우두마리를 당황하게 한다. 숲 속에서 갑자기 피크닉 매트를 깔고 여우두마리를 눕히는가 하면, 여우두마리의 직장에 찾아가 건물 비상구에서 대담하게 애정을 표시한다. 이 정도 내용이면 상당한 수준의 노출과 성적 표현을 예상하겠지만, 실제로 자극적인 장면이라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한때의 반짝 연애처럼 <바람피기 좋은 날>의 두 커플은 ‘바람 피우기 좋은 계절’에 잠깐 만나 사랑을 나눈다. ‘사랑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이슬의 대사처럼 두 유부녀의 사랑은 단지 정신적·육체적 쾌락을 잘못 인식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착각 같은 사랑은 너무도 덧없어 보인다. 불륜을 들킨 후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간 이슬과 여전히 남편과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있는 작은새가 앞으로도 계속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리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두 유부녀의 삶은 자유롭고 경쾌하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는 결혼제도가 앗아갈 수 없는 자유와 열정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통풍 안 되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나는 상큼한 여행처럼 그들은 ‘바람’을 사랑이라 착각하며 즐거운 삶을 이어갈 것이라고 엔딩 장면은 암시한다. 불륜의 밝고 역동적인 면을 발랄한 화면에 담은 장문일 감독은 이 지점에서 더 이상의 발언은 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잣대도, 심층적인 성찰도 이 영화엔 없다. 법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유부녀의 불륜을 다루고 있지만 <바람피기 좋은 날>은 결코 심각하거나 무거운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설교도 애써 피한다.
‘가슴 뛰는 사랑과 연애의 즐거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자유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표현하고 싶다고 말한 장문일 감독의 설명처럼 <바람피기 좋은 날>은 두 유부녀의 자유분방한 연애를 묘사한다. 연애의 설렘, 섹스의 즐거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 등이 모두 녹아 있다. 불륜의 긍정적인 면을 여성의 시각에서 무겁지 않게 포착했다는 것만으로 <바람피기 좋은 날>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소재와 전개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시선만은 너그럽고 긍정적이다. 베드신이 러닝타임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자극적인 소재를 그리고 있지만, 묘사되는 내용 자체는 외설과 거의 관련이 없다. 음습하지 않고 발랄하며 경쾌하다. 다만 여기저기서 끼어드는 불필요한 장면들이 영화의 자연스런 흐름에 흠집을 낸다.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모텔에서 두 커플이 만나게 되는 작위적인 설정이나 뜬금없이 끼어드는 판타지 장면, 불필요한 차량 폭발 장면 등이 그렇다. 특히 영화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슬의 ‘바람아 멈추어다오’ 노래 장면은 충분히 역설적이고 상징적이지만 별다른 맥락이 없어 영화의 중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도시의 거리에 불어 닥치는 거센 가을 돌풍 장면도 은유의 유무와는 상관 없이 영화의 초점과 너무 멀어 오히려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바람’의 표피적인 면에 너무 많은 부분이 할애되어 직접 묘사와 은유·상징의 균형이 깨져버린 탓이다.
HOT 불륜에 빠진 여자를 윤리주의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여성의 시선을 통해 사랑의 자유를 논한다는 점이 신선하다.
COLD 불륜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은 산뜻하고 새롭지만, 묘사되는 내용들은 다분히 피상적이다.
고경석 기자 (kave@ticketlink.co.kr)
[2/8 개봉작 리뷰]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 - 한 지붕 세 관장!
조그만 시골마을에 세 명의 무술관장이 있다. 진정한 고수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라 믿고 있는 태견도장 김관장(신현준), 어린 시절의 가슴 아픈 기억으로 무도인의 길을 걷게 된 검도도장 김관장(최성국), 뒤늦게 개업했지만 뛰어난 실력과 출중한 외모로 동네아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버린 쿵후도장 김관장(권오중)이 그들. 세 명의 무술관장이 한 마을에 같이 살고 있는 탓에 마을이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3인의 김관장들은 수련생 모집을 위해 음모술수를 쓰는 한편, 동네 최고의 미녀 박연실(오승현)의 눈에 들기 위해 모진 수련을 감행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날 마을 재개발에 관한 정보를 얻은 마을의 조직폭력배가 마을 건물들을 하나둘씩 사들이기 시작한다. 이에 서로 앙숙이던 세 김관장이 이들에 대항해 처음으로 손을 잡게 된다.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이하 '김관장')은 택견, 검도, 쿵후 관장들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다양한 볼 거리를 선사한다. 택견 김관장의 기예에 가까운 제기차기나 촛불 열다섯 개를 단번에 꺼버리는 검도 김관장의 빠른 검놀림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쿵후도장 김관장 역을 맡은 권오중의 사실감 있는 액션이 이 영화의 백미다. 실제로 쿵후 3단인 권오중은 이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5개월 동안 매일 8시간씩 강도높은 쿵후 수련을 한 결과 쿵후선수 못지 않은 실력을 선보인다. 택견 김관장의 아들 김도령 역을 맡은 아역 배우 권오민의 깜찍한 연기는 영화의 재미를 더하며, 여기에 수많은 카메오들이 '깜짝' 등장해 예기치 못한 웃음을 선사한다.
<베사메무쵸>의 조감독 출신 박성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김관장>은 우리의 고유무술인 택견을 비롯, 쿵후와 검도 등 무술을 영화의 소재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발상이 눈에 띄는 코미디영화다. 그러나 번번히 시작도 못한 채 끝나버리는 무술 대결 장면 때문에 영화의 주요소재인 무술이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무술만이 문제는 아니다. 세 김관장의 충돌을 통해 갈등을 증폭시켜 나가던 이야기 구조는 후반부 이들 셋이 힘을 합해 조직폭력배와 맞서면서 중심을 잃어버린 채 휘청거린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 수많은 에피소드들은 순간적인 웃음을 유발할 뿐 이야기를 탄탄하게 쌓아가지 못한다. <김관장>은 액션과 코미디, 로맨스 요소가 골고루 포함되어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채 막을 내리고 마는 우를 범하고 만다.
HOT 검도와 쿵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무술인 택견을 한 화면에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치않다.
COLD 순간적인 재치에 기댄 코미디인 탓에 이야기가 쌓이지 못한 채 후반부로 갈수록 지지부진해지는 단점을 보인다.
김영서 기자 (nodata@ticketlink.co.kr)
[2/8 개봉작 리뷰] <황혼의 사무라이> - 그 시절, 진짜 사무라이의 세계
영화 퀴즈 하나.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리즈가 제작된 극장용 장편 영화는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21편까지 제작된 <007> 시리즈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오답이다. 정답은 48편까지 제작된 일본의 대표적인 서민 영화 시리즈 <남자는 괴로워 Tora-san>다. 야마다 요지는 48편의 시리즈 중 3편과 4편을 제외한 46편을 연출해 일본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오시마 나기사나 시노다 마사히로 같은 동시대 감독들에 비해 소박하고 서민적인 영화를 주로 만들어 온 ‘국민감독’ 야마다 요지는 1969년부터 1995년까지 26년간 <남자는 괴로워>에 모든 열정을 담아냈다. 시리즈에 유난히 강한 야마다 요지는 1988년부터 2006년까지 <낚시바보일지 Free and Easy> 시리즈 17편의 모든 각본 작업에 참여했고, 1993년부터 2000년까지는 네 편의 <학교 A Class to Remember> 시리즈를 연출했다. 주로 서민적인 코미디나 가족 드라마에 재능을 보여온 야마다 요지가 2002년부터 갑자기 사무라이 영화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데뷔한 지 41년 만에 처음으로 시대극을 찍겠다고 나선 것이다. 정식 시리즈는 아니지만 야마다 요지는 2006년까지 총 세 편의 사무라이 영화를 연출했다. 그 시작이 77번째 연출작 <황혼의 사무라이 The Twilight Samurai>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일본의 시대 소설가 후지사와 슈헤이의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일본의 영화전문지 [키네마 준보]로부터 2002년 최고의 일본영화로 선정된 <황혼의 사무라이>는 감독, 각본(야마다 요지, 아사마 요시타카), 남녀주연(사나다 히로유키, 미야자와 리에) 부문에서도 트로피를 휩쓸었다. 일본 아카데미상에서는 13개 부문을 독식할 정도로 대단한 평가를 받았고,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되는 한편 아카데미 외국어영화 부문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인 호평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이렇게 요란한 평가는 오히려 영화 감상에 방해만 될 뿐이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화려한 수상 경력에 비해 너무나 수수하고 소박하며 차분한 서민 영화이기 때문이다. 사무라이가 등장하는 영화지만 액션 장면이라고는 두 장면밖에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서정적이다. 여기서 사무라이는 영웅 같은 무사가 아니고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서민일 뿐이다.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야마다 요지가 그리는 사무라이의 세계는 현란한 검술과 비장한 대결, 영웅과 악당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 위치한다.
영화의 내용은 무척 단순하다. 마을의 식량창고를 담당하는 하위 무사 세이베이(사나다 히로유키)는 폐병에 걸린 아내를 잃은 후 노모와 병든 두 딸을 먹여 살리느라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해만 지면 동료들과 술도 마시지 않고 바로 집에 간다 해서 별명도 ‘황혼의 세이베이’다. 어느 날 에도에서 돌아온 친구 이누마로부터 그의 여동생 토모코(미아쟈와 리에)가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세이베이는 토모코가 자신의 집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어릴 적부터 토모코를 흠모해 왔던 세이베이는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다 전 남편 코다(오스기 렌)의 행패를 말리는 과정에서 그로부터 결투 신청을 받기에 이른다. 다음날, 목검을 들고 결투에 나선 세이베이는 어렵지 않게 코다를 제압한다. 한편 세이베이는 친구 이누마로부터 토모코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지만, 자신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결혼 제의를 거부한다. 코다를 목검으로 제압했다는 소문이 전해지자 세이베이는 마을의 번주로부터 무사 요고(다나카 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살생을 원치 않는 세이베이는 번주의 뜻을 거부하지만 협박에 가까운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칼을 꺼내 든다. 결전의 날이 되자 세이베이는 급히 토모코를 불러 머리 손질을 부탁하고 조심스럽게 마음을 고백한다.
메이지 시대가 시작되기 직전, 막부 시대 말기의 사무라이는 초라하기만 하다. 무사로서의 위엄을 살릴 여유도 없이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 하루를 꼬박 바쳐야 한다. 봉급도 쥐꼬리만큼 적고 부업도 신통치 않다. 정치적인 분쟁에 소모품으로 이용되면 개미처럼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 서양으로부터 총이 유입되어 검술의 가치도 예전 같지 않다. 세이베이는 황혼의 시기에 접어든 막부 시대에 살았던 한 명의 사무라이에 지나지 않는다. 세이베이가 죽여야 하는 요고 역시 마찬가지다. 요고가 세이베이에게 털어놓는 신세 한탄은 막부 시대 말기의 사무라이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 야마다 요지 감독은 특유의 온정 어린 시각으로 한 명의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고자 했던 한 명의 사무라이를 조명한다. 야마다 요지는 느리고 침착한 시선으로 세이베이의 일상을 바라보다 아주 천천히 관객들을 결투 장면으로 초대한다. 전대미문의 차분하고 쓸쓸하며 고요한 대결 장면은 단연 <황혼의 사무라이>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특히 <메종 드 히미코 Maison de Himiko>에서 죽음을 앞둔 동성애자를 연기했던 무용가 다나카 민의 검술 장면은 압권이다. 하지만 영화는 대결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황혼의 사무라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황혼의 두 사무라이’가 나누는 대화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옛날 옛적, 진짜 사무라이는 이렇게 살았다고.
HOT 일본의 국민감독 야마다 요지가 그리는 독특한 서민 사무라이 영화. 일본영화의 느리고 섬세한 특징을 좋아한다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역작이다.
COLD 사무라이 활극을 기대한다면 절대 ‘비추’인 영화.
고경석 기자 (kave@ticketlink.co.kr)
2/8 개봉작 리뷰] <파리의 연인들> - 다 큰 어른들의 달콤한 성장통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 명품 상점이 늘어선 몽테뉴 거리와 샹제리제 극장, 플라자-아테네 호텔을 잇는 이곳이 <파리의 연인들 Fauteuils d'orchestre>의 배경이다. 오는 2012년까지 공연 스케줄이 모조리 잡혀있는 피아니스트 장 프랑소와(알베르 뒤퐁텔)와 유명 TV 배우 카트린느(발레리 르메르시에), 미술품 수집가 자크(클로드 브라세르)가 이 거리에 머물고 있다. 각자의 예술분야에서 ‘한 명성’ 하는 이들은 그러나, 고민이 많다. 장 프랑소와는 시스템에 발 묶인 채 기계처럼 피아노를 두들겨대는 자신의 모습이 갑갑하고, 카트린느는 거장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지만 캐스팅이 쉽지 않다. 미술품 수집가 자크는 부와 명예, 노년에 찾아온 사랑까지 모든 걸 얻었지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올라온 제시카(세실 드 프랑스)의 이야기가 덧입혀진다.
극장 옆 카페 웨이트리스가 된 제시카. 제시카를 중심으로 그녀의 손님인 피아니스트와 배우, 미술 수집가의 이야기를 겹쳐두는 <파리의 연인들>은 사실 ‘연인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자크의 아들 프레데릭(크리스토퍼 톰슨)과 제시카의 로맨스가 영화에 따뜻한 기운을 새기긴 하지만 사랑에 초점을 두기엔 여러모로 부족하다. <파리의 연인들>은 그보다 사회적 명성을 떠나 ‘진짜 자신의 꿈’을 이루길 원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아내와 아들 등의 주변인물들과 갈등을 반복하지만, 이를 딛고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잔잔하고 따뜻하게 그려진다. 다 큰 어른들의, ‘꿈’을 향한 뒤늦은 성장통인 셈이다.
<파리의 연인들>은 ‘보는’ 재미와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파리의 풍경들이 우선 매혹적이고, 카트린느가 연기하는 연극 한 토막을 감상하는 것도 재미다. 또한 큐비즘 화가 브라크의 그림도 살짝 감상할 수 있다. <인터프리터 The Interpreter> <아웃 오브 아프리카 Out of Africa>의 시드니 폴락 감독은 카트린느의 우상인 거장 감독으로 깜짝 출연한다. 피아니스트 장 프랑소와의 피아노 선율, 영화 내내 흐르는 샹송 음색을 감상하는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소피 마르소를 만인의 연인으로 만든 <라붐 La Boum> <유 콜 잇 러브 L'Etudiante>의 공동 작가 다니엘르 톰슨이 연출한 <파리의 연인들>은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 개봉해 2백만 관객을 모았다.
HOT 블록버스터와 코미디영화 천국인 극장가, 잔잔한 감동과 따스한 위안이 필요하다면 <파리의 연인들>이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
COLD 원제인 ‘오케스트라 좌석’이 한국에 와 ‘파리의 연인들’로 바뀌었다. 제목만 보고 ‘연인들’이 감상하기 좋은 로맨스영화를 기대한다면 실망할지도.
박아녜스 기자 (fatcat@ticketlink.co.kr)
[2/8 개봉작 리뷰] <샬롯의 거미줄> - 우정에 관한 따뜻한 우화
어느 봄날에 태어난 아기 돼지 윌버(도미니크 스콧 케이)는 펀(다코타 패닝)의 도움으로 도살될 뻔한 위기를 넘기고 펀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러나 몸집이 점차 커지면서 윌버는 펀의 외삼촌네 헛간으로 보내진다. 펀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윌버는 헛간에 사는 동물들과 친구가 되고 싶어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모두들 윌버를 멀리한다. 그때 헛간 천정에 붙어사는 거미 샬롯(줄리아 로버츠)이 윌버에게 친구가 되어주기로 약속한다. 친구를 얻게 돼 행복해하는 윌버에게 헛간 지하에 사는 심술궂은 쥐 템플턴(스티븐 부세미)이 청천벽력같은 말을 전해준다. 봄에 태어난 돼지는 크리스마스에 햄이 되어 식탁에 올라갈 운명이라는 것. 첫눈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던 윌버는 이 말을 듣고 절망에 빠진다. 그때 샬롯이 윌버를 위로하며 끝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날 밤 샬롯은 윌버를 위해 '멋진 돼지'라는 단어를 거미줄에 새겨놓는다.
<샬롯의 거미줄 Charlotte's Web>은 <스튜어트 리틀 Stewart Little>의 원작자인 E.B. 화이트가 쓴 동명의 동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오랫동안 농장 생활을 하며 농장 생활에 대한 애정을 작품에 담아낸 화이트는 [샬롯의 거미줄]에서도 농장을 배경으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친구, 돼지와 거미의 우정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예찬한다. 원작의 의도를 충실히 되살려낸 영화 <샬롯의 거미줄>은 <아이 앰 샘 I Am Sam>과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 등에서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였던 다코타 패닝의 동물들과의 탁월한 앙상블을 만들어내고, 여기에 줄리아 로버츠를 비롯, 스티븐 부세미, 오프라 윈프리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가 어우려져 소박한 감동을 전달한다. 시고니 위버 주연의 <올챙이 Tadpole>로 2002년 미국 선댄스영화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고 <완벽한 그녀에게 딱 한가지 없는 것 13 Going On 30>를 연출한 게리 위닉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정의 소중함을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해낸다.
가슴 따뜻한 영화 <샬롯의 거미줄>에 대한 미국 언론과 비평계의 반응도 상당히 호의적이다. "따뜻함과 위트, 놀라움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영화"라는 평에서부터 "진정성과 오락성이 함께 살아있는 영화" ".E.B. 화이트의 원작을 보다 풍부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 "감동을 강요하거나 설교하지 않는 균형감각이 돋보이는 영화" "배우들의 훌륭한 목소리 연기와 동물들의 놀라운 연기, 컴퓨터 그래픽이 조화를 이룬 작품" 등 미 언론 매체의 평가는 칭찬 일색일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미 언론의 평가처럼 <샬롯의 거미줄>은 영화의 완성도나 배우들의 연기 모두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편이다. 눈높이가 어린이에 맞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훈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탓에 단순하고 예측가능한 이야기 구조가 어른들에게는 단조로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다.
HOT 탄탄한 원작 동화가 바탕이라는 점, 연기 신동 다코타 패닝의 검증된 연기력, 줄리아 로버츠, 스티븐 부세미, 오프라 윈프리 등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목소리 연기를 했다는 점 등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상당하다.
COLD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져 있는 단순한 이야기는 어른들에게는 지루함을 줄 수도 있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ticket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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