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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3.15 3월3주, 개봉영화 소개합니다 ^^*
- 2007.03.07 3월2주, 개봉영화 소개합니다~
글
5월2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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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개봉작 리뷰] <바람난 여자> - 바람난 여자들의 침실 풍경 입력시간 : 2007-05-07 09:32
칠레영화 <바람난 여자 Mujeres infieles>는 유부녀의 외도에 초점을 맞춘 에로영화다. 영화는 TV 방송국의 진행자인 유명 여성의 외도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벌이는, 혹은 상상하는 외도를 엮어놓는다. <바람난 여자>는 남편 앞에서는 조신하게 행동하다가도 정부 앞에서는 부끄럼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덤벼드는 여자들의 모습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으로 에로영화로서의 의무를 다한다. 영화는 칠레 여성의 62%가 외도를 한다는 '미확인' 통계를 내세워 수많은 유부녀들의 외도가 사회적인 문제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제 영화가 관객들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은 벌거벗은 남녀가 한몸이 되어 침대 위를 뒹구는 모습일 뿐이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
사진작가 민우(김윤태)가 이름 모를 여인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고 그 자리에서 사망하는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여인의 몸에 손을 댄 민우는 한 생명이 피부 위에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그 감촉을 잊지 못한다. 다음 날 민우는 학창시절 연인이었던 재희(김주령)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다. 잊혀졌던 감정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 재희는 민우에게 아홉 번의 섹스를 제안하고, 민우와 재희는 그 후로 서로의 육체를 정신 없이 탐닉하기 시작한다. 한편 새로 자취방을 구하게 된 민우는 그 방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누군가 방안에 들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재희와 그 방에서 육체적 관계를 갖는 동안엔 한 소녀의 환상도 경험하게 된다.
<살결>은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 <천년여우 여우비>로 잘 알려진 이성강 감독의 실사 영화다. 이성강 감독은 그간 동화적인 상상력과 아름다운 영상이 어우러진 애니메이션을 만들어온 사람이지만, 강도 높은 섹스신이 등장하는 <살결>을 통해 그간의 작품과 철저히 차별을 꾀한다. 우선 주인공 민우와 재희는 어두침침한 호텔과 자취방을 전전하며 몸을 뒤섞는 사이다. 불륜인 이들의 사랑은 강렬하고 몽환적이기보다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우울하다. 소년과 소녀의 잔잔한 사랑을 담아낸 <마리 이야기>와 <천년여우 여우비>를 기억한다면 건조하고 단편적인 대화만을 주고 받는 민우와 재희의 관계가 몹시 씁쓸하게 느껴질 것이다. 영화는 사진작가 민우의 비루한 일상을 뒤쫓으며 정치, 사회 등 보다 현실적인 문제에도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는 이야기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죽은 여자의 영혼과 살아있는 연인의 육체를 동시에 느끼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모호하게 그려지며, 이곳 저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산만하게 나열된다. 죽은 자의 영혼이 살아있는 사람의 자의식과 만난다는 설정은 인상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영혼을 느끼는 한 남자의 이야기에 공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살결>은 한국에서 제작된 두 번째 장편 HD 디지털 영화로 <가족의 탄생> <천하장사 마돈나>의 조용구 촬영감독이 촬영을 담당했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못 말리는 결혼> - 김수미의 카리스마에 기댄 코미디
닥종이 공예가 은호(유진)는 풍수 지리 전문가 지만(임채무)의 외동딸이다. 유방성형 전문 성형외과 의사 왕기백(하석진)은 서울 강남의 큰손 심말련(김수미) 여사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패러 글라이딩을 함께 한 인연으로 서로 알게 된 은호와 기백은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만나는 사이 정이 든다. 결혼까지 결심한 두 사람과 달리 양가 부모는 이들의 결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심말련 여사는 은호가 마음에 안 들고, 지만도 기백이 성에 차지 않는다. 여기에 지만의 동생 지루(윤다훈)와 심말련 여사의 첫째딸 애숙(안연홍) 사이에 핑크빛 무드가 감돌면서 두 사람의 결혼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만이 소유한 땅이 심말련 여사의 골프장 건설 프로젝트에 걸림돌이 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못 말리는 결혼>은 서로 성장 환경이 다른 두 남녀가 양쪽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결혼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다. 기본 설정은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과 유사하다. 영화는 지만과 심말련 여사를 [로미오와 줄리엣]의 몬태규 가와 캐풀럿 가와 같은 대립 관계로 설정하고, 이들의 자식들이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풀어놓는다. 그러나 <못 말리는 결혼>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비슷한 점은 양가 부모가 서로 악연으로 엮였다는 점뿐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은 완전히 딴판이다. 청춘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부터 결혼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은 설득력이 없고, 두 집안의 반대 양상도 일차원적인 수준에 머문다. 두 집안의 어른들이 화해를 결심하는 계기도 납득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촘촘한 이야기 구성을 포기한 대신 <못 말리는 결혼>이 선택한 것은 말초적인 웃음이다. <마파도> 시리즈와 <가문의 영광> 시리즈 등에서 인기를 끈 김수미의 거침없는 입담과 욕설은 <못 말리는 결혼>에서 더욱 강도가 세졌다. 심말련 여사의 골프장 건설 프로젝트가 미국 회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 덕분에 김수미는 영어 욕까지 해가며 관객들을 웃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복면달호>로 스크린을 경험한 중견 탤런트 임채무는 두 번째 영화 <못 말리는 결혼>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패러디해 웃음을 유도한다. 공주병 환자 애숙 역의 안연홍이나 40대의 백수 지루를 연기한 윤다훈이나 웃기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 한 개성하는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해 찰나적인 웃음을 뽑아내기에 급급한 <못 말리는 결혼>에서 그나마 볼 만한 점을 찾아낸다면 김수미의 카리스마뿐이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용호문> - 만화적 상상력과 전통 무협이 만나다
용호문은 범죄가 들끓고 있는 혼란기에 정의를 수호하고자 설립된 무술수련 단체다. 전설의 무림고수 왕복호(원화)는 발차기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왕소호(사정봉)를 가르치며 용호문을 지키며, 왕소호의 친형인 왕소룡(견자단)은 어린 시절 집을 나와 삼합회의 중간보스로 일한다. 왕소룡, 왕소호 형제는 범죄조직인 나찰문의 나찰영패를 둘러싼 싸움 도중 재회하고, 쌍절곤의 고수 석흑룡(여문락)은 우연히 이 싸움에 말려들며 용호문의 제자로 수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한편, 나찰문의 보스인 화운사신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데 걸림돌이 되는 용호문을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한다. 용호문을 찾아간 화운사신은 왕복호를 처단하고 용호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이제 왕소룡, 왕소호 형제와 석흑룡은 화운사신을 물리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1975년부터 30여년 동안 연재된 황옥랑의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용호문 Dragon Tiger Gate>의 이야기 구조는 짧고 단순하다. <용호문>은 자신을 가르치던 사부가 악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혹독한 수련을 거쳐 복수를 한다는 무협물의 전형을 그대로 따른다. 각 캐릭터들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나눠지며, 주인공들은 사랑과 우정, 신의를 지키기 위해 악을 처단하는 여정을 떠난다. 십 수년간 범죄조직에 몸 담아온 왕소룡이 보스를 배신하기로 결심했을 때도 주인공들에게서 고뇌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용호문>은 치밀한 이야기에 무게중심을 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주먹과 주먹이 오가고 일대다의 활극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수 액션영화다. 영화는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펼치는 화려한 액션으로 가득하다. 주인공 왕소룡은 오로지 주먹만을 사용해 대결을 펼치고, 왕소호는 화려한 발차기 기술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쌍절곤의 대가 석흑룡이 신기에 가까운 무술을 선보일 때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영화의 초반부 식당 액션 장면은 육중한 타격감을 선사하는 리얼액션과 화려한 카메라 워크가 빛을 발한다. 이들의 개성 넘치는 장기는 컴퓨터그래픽을 통해 보다 화려하고 과장되게 표현된다. 강룡십팔장, 전광독룡찬, 금종조라는 각자의 필살기를 연마한 이들이 펼치는 마지막 액션신은 만화적 상상력과 전통 무협이 결합된 명장면을 만들어 낸다. <용호문>은 <살파랑 S.P.L.>으로 유명한 엽위신 감독과 견자단 무술감독 겸 배우가 손을 잡고 제작한 두 번째 작품이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9월의 어느 날> - 9.11테러의 배후를 파헤쳐라!
2001년 9월 1일, 프랑스 비밀요원 이렌느(줄리엣 비노쉬)는 상부로부터 과거 동료였던 엘리엇(닉 놀티)를 도우라는 지령을 받는다. 한때 프랑스 비밀요원이었던 엘리엇은 현재는 이중스파이로 변신해 철저히 종적을 감춘 상태다. 엘리엇은 이렌느에게 그의 친딸인 올란도(사라 포레스티에르)와 미국인 의붓아들인 데이빗(톰 라일리)을 데리고 나올 것을 요구한다. 엘리엇의 목숨을 노리는 킬러 윌리암(존 터투로)의 방해로 파리에서의 1차 접촉이 무위로 돌아가고, 이렌느는 이들과 함께 제2의 접선 장소인 베니스로 향한다.
<9월의 어느 날 Quelques jours en septembre>은 2001년 9월 1일부터 11일까지 12일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2001년 9월 11일은 미국 뉴욕에서 두 동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붕괴한 바로 그 날로, <9월의 어느 날>은 9.11 테러 뒤에 배후와 음모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가상 스릴러 영화다. 영화의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지난 1989년부터 현재까지 300편이 넘는 시나리오와 여러 편의 베스트셀러를 내놓은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 산티아고 아미고레나다로, 이 영화는 그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다.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9.11 테러를 큰 구조로 하는 <9월의 어느 날>에는 프랑스와 미국 등 국제 스파이의 개인사와 프랑스 비밀요원, 이들을 움직이는 배후 세력의 이해관계, 두 이복남매의 근친상간 등 다양한 이야기가 촘촘히 깔려있다. 작가 출신인 감독의 능력이 맘껏 발휘된 부분. 그러나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다보니, 정작 영화의 출발점이었던 9.11 테러의 음모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영화의 시간적 배경에 그쳐버리는 듯한 느낌도 지울 수는 없다. <9월의 어느 날>에는 아르헨티나 신인 감독의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빅 스타들이 대거 주연으로 등장하고 있는 점이 이채롭다. 프랑스의 대표 여배우인 줄리엣 비노쉬가 냉철한 비밀요원 이렌느 역으로 출연, 기존 이미지와는 차별되는 강한 여성 상을 연기하며, 존 터투로와 닉 놀티는 짧은 출연 분량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내일의 기억> - 와타나베 켄의 눈물이 주룩주룩
사에키(와타나베 켄)는 업계 내에서 인정받는 광고회사 중역으로 회사 내에서도 유능한 상사로서 부하직원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외동딸의 결혼을 앞두고 새로운 프로젝트 ‘기가포스’ 광고에 매달리던 사에키는 자신의 기억력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이다. 처음에는 차 열쇠를 깜박하거나 회의 시간을 잊어버리는 등 사소한 문제로 시작하지만, 점점 사람들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거나 자주 가던 건물의 위치를 잊어버리는 등 심각한 수준으로 옮겨간다. 딸의 결혼식까지 회사에 몸담고 싶었던 사에키는 더 이상 기가포스 광고 프로젝트를 이끌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자료관리 부서로 옮겨 퇴직 준비를 서두른다. 딸을 시집보내고 회사도 그만둔 채 아내 에미코(히구치 카나코)와 단둘이 살아가던 사에키는 사라져 가는 기억들을 붙잡으려 애를 쓰면서도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아내를 떠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내일의 기억 Memories of Tomorrow>은 <라스트 사무라이 The Last Samurai> <게이샤의 추억 Memoirs of a Geisha> 등 주로 할리우드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는 일본배우 와타나베 켄의 첫 번째 단독 주연작이다. 와타나베 켄은 17년 전 단독 주연으로 캐스팅된 적이 있지만 백혈병 판정으로 인해 이를 포기해야 했고, 이후 두 번의 죽을 위험을 넘기면서 기적적으로 연기생활을 재기할 수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활짝 꽃을 피고 있는 와타나베 켄은 <게이샤의 추억> 촬영 도중 동명의 원작소설을 읽고 <내일의 기억> 영화화를 결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신의 고통스런 기억과 작품 속 주인공의 시련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와타나베 켄은 작품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주연배우이자 제작자로서 나선 와타나베 켄은 감독을 선정하고 함께 시나리오 작업은 물론 광고대행사와 요양원 등을 취재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와타나베 켄은 체중을 8킬로그램까지 감량하면서 역할에 빠져들었다. 말하자면 <내일의 기억>은 와타나베 켄의 영화인 셈이다.
<내일의 기억>은 전형적인 최루성 가족 멜로드라마의 소재로 시작한다. 아직 중년의 나이인 남자 주인공은 건장한 체격과 달리 이른 알츠하이머 발병으로 힘겨운 나날들을 맞이한다. 건망증 수준의 1단계를 지나 퇴직 직전의 2단계를 넘어서면 사에키는 홀로 지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증상이 악화되는 3단계를 맞이한다. 종종 주인공들의 눈물 장면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내일의 기억>은 의도적으로 눈물을 쏟아내려는 최루성 드라마가 아니다. 와타나베 켄과 감독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겪는 고통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하며 자연스러운 눈물을 유도한다. <내일의 기억>은 예술적 성취를 목표로 만든 영화도 아니고, 인생에 대해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작품도 아니며, 그렇다고 흥행만 염두에 두고 제작된 영화도 아니다. 삶과 죽음, 기억, 타인에 대한 아주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종종 신파적이고 사실적이며 밋밋하고 지루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연출은 드라마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가까이서 본 기차> - 웃음과 풍자로 그린 체코 현대사
2차 세계대전으로 어수선한 체코의 한 시골 마을에 22살의 젊은 청년 밀로쉬(바츨라프 네카르시)가 철도원으로 부임한다. 밀로쉬는 역장인 막스(블라디미르 발렌타)와 선배인 후비치카(요세프 소므르)에게 역무원으로서 배워야 할 이모저모를 전수받고 있기는 하지만, 차장 마샤(이트카 벤도바)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어 애달픈 가슴앓이를 시작한다. 마샤에게 근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남들처럼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뽀뽀하려는 찰나에 갑자기 열차가 출발하고, 모처럼 가진 둘만의 하룻밤엔 너무 긴장해서 사랑을 나누는데 실패한다. 그 와중에 후비치카는 시골역에 방문하는 수많은 여자들을 홀리며 밀로쉬의 마음을 긁어 놓는다. 한편 레지스탕스는 독일의 무기수송열차를 폭파하려는 작전에 돌입하고, 밀로시도 이를 돕기 위해 손을 걷어 붙인다.
<가까이서 본 기차 Closely Watched Trains>(1966)는 비행기가 폭격을 퍼붓고 건장한 청년들이 징병되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의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던 체코의 현실을 걱정 어린 시선으로 다루기보다는 시골역에 근무하는 체코 소시민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무용성을 우회적으로 풀어간다. 주인공 밀로쉬는 여자친구 마샤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아 늘 근심투성이다. 철도원 선배인 후비치카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성적으로 무기력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서 자살도 감행해 보지만 이 모든 것들이 뜻하는 바대로 되질 않는다. 역장인 막스는 자신의 직무보다 비둘기 키우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독일군 기차 테러를 위해 잠입한 레지스탕스는 시골역에서 질펀한 하루 밤을 보내고 사라진다. 전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이들이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하루를 보내지만 비극적인 시대를 통과하는 체코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눈물 대신 웃음으로 풀어가는 영화의 화법은 전쟁의 무의미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된다.
<가까이서 본 기차>는 체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이리 멘젤의 장편데뷔작이다. 이리 멘젤 감독은 <가까이서 본 기차> 이후 <줄 위의 종달새 Larks on a String>(1969) <나는 영국왕을 섬겼다 I Served the King of England>(2006) 등을 발표하며 체코의 비극적 현대사를 웃음과 풍자로 그려낸 거장 감독이다. 그는 체코 소시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본성과 사회체제의 부조리를 희비극으로 풀어냈으며,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정권이 된 체코에 끝까지 남아 작품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가까이서 본 기차>는 체코의 국민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며, 미국 개봉 당시 현지 평론가들은 오손 웰즈의 <시민 케민 Citizen Kane>(1941)과 비교하며 20대 젊은 감독이 만든 20세기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1968년 미국아카데미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세계영화사에 체코영화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경의선> - 치유와 희망을 이야기하는 비극적 멜로드라마
각자의 상처를 안은 채 두 사람이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남자의 이름은 만수(김강우). 지하철 기관사로 일하는 평범한 근로자이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과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한나(손태영)라는 이름의 여자는 대학의 독문과 시간강사로 부유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층의 지식인이다. 여자의 대사를 인용하자면, 남자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여자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일을 한다.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남자에게는 매일 플랫폼에서 간식과 잡지를 건네는 여자가 있다. 대화 한마디 나눈 적이 없지만 만수는 여자로 인해 활력을 얻는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생활 속에서도 힘을 낼 수 있는 이유다. 한나에게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자가 있다. 같은 과 교수로 재직 중인 유부남 대학 선배와 위험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한나는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하다. 두 사람은 뜻밖의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만수는 열차 운행 도중 투신자살 사건을 겪은 후 큰 충격에 빠지고, 여자는 생일을 맞아 선배와 여행을 떠나려다 선배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쓰라린 상처를 안은 채 두 사람이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싣는다.
<경의선>은 무척 직설적인 은유와 대조법을 사용하는 영화다. 남한의 서울에서 평양을 이어 신의주까지 이어진 경의선은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해 통근열차로만 사용되는 철도다. 두 사람이 내린 임진강역은 경의선의 시종착역으로 남과 북의 연결이 끊긴 분단의 상징과도 같은 지점이다. 두 사람은 청춘의 정점에서 막다른 길에 처한다. 남과 북이 다르듯 두 사람이 처한 환경은 극과 극이다. 남자는 떠나기 위해 집을 나서고, 여자는 만나기 위해 짐을 꾸린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일을 하는 남자와 스스로를 잉여인간 같다고 느끼는 여자는 눈 내리는 밤 막차가 끊긴 임진강역에서 만나 속내를 꺼내놓는다. 이별의 끝에서 두 사람은 만나고, 절망의 끝에서 두 사람은 희망을 발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사람은 죽음을 인정하는 순간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찾게 된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희극적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희망에 관한 비극적 멜로드라마다. <경의선>이 빛나는 순간은 바로 비극적 멜로드라마가 희망의 드라마로 전환하는 지점이다. 고백성사 같은 대화가 오갈 때 생면부지의 남녀는 서로에게 치유의 단서가 된다. 코미디영화 <역전의 명수>로 데뷔한 박흥식 감독은 자신의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 <경의선>을 통해 확실히 밝힌다. 표피적인 웃음을 조작하는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감독은 딱딱하고 건조한 문어체 어투로 문학적인 내러티브를 차근차근 느릿느릿 풀어낸다. 숏의 지속시간이 길고 대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무심한 듯 집요한 것은 인물의 내면에 보다 가까이 가려는 감독의 의지 때문이다. 그 속에서 감독은 상처와 절망의 단어를 찾아내 치유와 희망의 언어로 환원시킨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5/10 개봉작 리뷰] <상어> - 비루한 오늘을 넘어
한여름 뙤약볕이 뜨거운 대구의 한 공원. 마산에서 올라온 어수룩한 청년 영철(구성환)과 교도소에서 막 출소한 유수(홍승일)가 한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 한겨울 외투를 껴입고 여름 마른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는 여자, 은숙(김미야)은 성폭행을 당한 이후 정신을 놓쳤다. 한편,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영철의 친구 준구(홍기준)가 포커 판을 열고 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대구에 온 영철의 존재에 대해 까맣게 잊을 만큼 포커 ‘빨’이 좋은 날이다. 그렇게 한여름 한 나절이 흘러간다. 그 사이, 준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영철이 얼음으로 포장해온 어린 백상어는 여름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간다.
<상어>는 준구와 영철, 유수와 은숙. 네 명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영화다. 인생의 특별한 사연 하나씩을 지닌 이들 네 사람을 이어주는 건 다름아닌 상어. 우연히 영철의 그물에 걸려들어 대구로 오게 된 백상어는 실성한 은숙에게 잃어버린 아이고, 유수에게 길을 방황하는 은숙을 꿰어 쉴 자리를 만들게 돕는 도구다. 또한 준구에게 보여주려고 얼음을 꽉꽉 채워 왔지만 대구의 여름 볕에 무방비 상태로 썩어가기 시작하는 상어의 여린 속살은 이들 네 사람의 비릿한 삶을 단면적으로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네 젊은이를 통해 생의 비루한 면들을 들춰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상어>가 비릿한 생의 진짜 얼굴을 그리는 데만 멈춰 서 있는 건 아니다. 바다의 기억을 몸 속 깊이 새기고 있는 어린 상어처럼 네 인물 모두 지금 현재의 아픔을 딛고 더 높은 생의 단계로 나아갈 희망을 가슴에 품는다.
여름날 코를 쥐어 싸게 만드는 생선 비린내마냥 비릿하기만 한 생의 처절함은 배우들의 호연으로 빛을 얻었다. 연극 판에서 오랜 세월 연기와 함께 한 여배우 김미야를 비롯해 네 인물 모두 꾸밈없는 ‘맨 얼굴’의 연기를 소화해낸다. 얼큰한 대구 사투리와 마산 사투리가 어울려 현실의 생생한 모습을 더하고, 도박판이나 술집, 작은 어촌 마을 풍경 등 영화 속 배경들은 현실의 진짜 풍경을 도려낸 듯 생생히 묘사됐다. 하지만 ‘상어’를 대표로 한 몇몇 상징과 비유에 영화가 너무 치중하다 보니 오히려 비유의 신선한 맛은 잃고 말았다. 김동현 감독이 연출한 <상어>는 31회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11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돼 관객과 이미 만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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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5월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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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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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이 다시 빌딩 숲 사이를 날아오른다. 1편의 어수룩한 고등학생, ‘알바’에 치여 살던 2편의 바쁜 대학생이 3편에 이르러 어느덧 어엿한 청년이 됐다. 인간으로, 또 슈퍼 히어로로서의 성장통을 딛고 자란 청년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 힘겹고 질긴 고뇌를 해온 그가 또 다시 맞닥뜨리게 될 문제란 과연 무엇일까? <스파이더맨 3 Spider-Man 3>는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들고 나타났다. ‘인간’ 피터 파커를 겨냥한 갈등과 ‘슈퍼 히어로’ 스파이더맨을 향한 악당들의 도전이 그것이다.
피터 파커(토비 매과이어)는 요즘 행복하다. 메리 제인(키어스틴 던스트)과는 ‘러브 러브’ 연애 모드고, 피자 배달로 용돈을 벌어야 할 만큼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도 않다. 원래 똑똑했으니 공부도 척척. 스파이더맨으로 여러 가지 사건들을 해결하느라 피곤하긴 하지만 ‘시민의 영웅’이 된 탓에 인기는 할리우드 배우들 뺨칠 만큼이다. 게다가 결혼도 하고 싶다. 메리 제인과 결혼해 잉꼬 부부였던 삼촌과 숙모처럼 사랑하며 사는 게 꿈이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의 삶은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법. 문제는 1, 2편과 달리 이번엔 상대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다는 거다.
각 시리즈마다 고블린과 닥터 옥토퍼스, 딱 한 명씩의 악당만 상대했던 스파이더맨에게 이번엔 세 악당이 한꺼번에 덤벼든다. 고블린의 아들이자 피터의 절친한 친구 해리 오스본(제임스 프랑코)이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뉴 고블린’이 된다. 1편에서 피터의 삼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플린트 마르코(토마스 헤이든 처치)는 온몸이 모래로 된 ‘샌드맨’으로 다시 태어나 단단한 주먹을 휘두른다. 피터 대신 신문사 사진기자 자리를 노리는 에디 브록(토퍼 그레이스) 역시 외계에서 온 유기체 심비오트에 감염돼 ‘베놈’이란 이름의 괴물로 탄생했다. 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피곤한데 문제가 또 있다. 스파이더맨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 때문에 괴롭다. 심비오트에 브록보다 먼저 감염된 스파이더맨은 자신 안에 복수심에 활활 불타는 ‘블랙 스파이더맨’이 불쑥 불쑥 나타나 난감하다. 블랙 스파이더맨은 대의는 나 몰라라, 개인적인 분노와 복수에 휩싸여 마구잡이로 힘을 쓰고 다닌다.
악당을 세 배, 네 배로 추가한 만큼 <스파이더맨 3>의 액션 스펙터클은 전편들을 가볍게 누른다. 거미줄을 쭉쭉 뽑아 그네 타듯 돌아다니던 스파이더맨의 스피드는 훨씬 빠르고 강해졌다. 영화 초반, 빌딩과 빌딩 틈 사이를 비집고 싸우는 뉴 고블린과의 대결, 샌드맨과 베놈, 뉴 고블린과 스파이더맨이 다같이 한 자리에 모여 합을 맞추는 액션 신은 전편의 어떤 액션 신에서도 보여준 적 없는 박진감과 파워를 선사한다. 위기의 순간 모래로 부서져 내리는 샌드맨, 고블린보다 더 정교한 칼날을 장착한 뉴 고블린 등 캐릭터의 특징에 따른 액션 비주얼도 시선을 잡아 끈다. 3억 달러(한화 2850억 원)라는 막대한 제작비는 이들 캐릭터를 표현하고 아드레날린이 한껏 분비되는 액션의 박진감을 위해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항상 홀로 악당과 맞서던 전편과 달리 각기 두 명씩 ‘조’를 만들어 함께 싸우는 액션 신도 <스파이더맨 3>만의 재미다.
돈도 벌고 연애도 하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정의마저 지켜야 하다니. <스파이더맨 2>는 이런 피터 파커의 고민을 다뤘다. 정의냐, 일상의 행복이냐를 두고 고민하던 스파이더맨은 그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캐릭터로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다. 액션과 함께 <스파이더맨 3>는 스파이더맨의 인간적 면모를 더욱 확장시킨다. 정의의 대명사로 불리지만 사실은 질투와 복수에 눈이 먼 또 다른 자아가 스파이더맨 내부에 있다는 ‘블랙 스파이더맨’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힘을 지닌 자가 복수 등의 개인적 감정에 휩싸일 때 얼마나 큰 위험과 직면할 수 있는지를 <스파이더맨 3>는 몸소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고민들이 2편만큼 생생하게 표현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이는 복수와 질투 등의 감정이 스파이더맨 마음에 자리잡은 ‘진짜’ 감정이라기보다 외계 생물체에게 숙주로 사용돼 오염된 ‘가짜’ 감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블랙 스파이더맨은 일반인과 똑같은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인 인물이 아니라 외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껍질로 그려질 뿐이다. 때문에 두 가지 자아 사이에서 고민하는 스파이더맨의 인간적 고뇌는 가슴을 울리지 않는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5/1 개봉작리뷰] <이대근, 이댁은> - 어느 늙은 아버지의 초상
초라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독거노인 한 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대근(이대근). 악극단 잡일을 하다 도장포를 운영하며 일생을 보낸 이대근은 세상을 떠난 아내의 기일을 맞아 흥신소 구 실장(박원상)에게 자식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한다. 사업이 망한 후 실종된 막내아들을 찾아내고, 장남(이두일)과 막내딸(안선영) 부부를 불러 모으는 것이 구 실장의 임무. 옷을 차려 입고 아들이 보낸 렌터카에 몸을 실어 장남 내외가 준비한 제사 자리에 참석한 이대근은 가족의 아픈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 TV 재연 프로그램 전문 배우로 근근이 살아가며 건강 보조기구 영업을 겸하고 있는 큰아들과 아버지의 괄괄한 성격을 이어받은 막내딸은 3년 만에 아버지를 다시 만나 예전의 갈등을 반복한다. ‘우리가 힘들 때 아버지는 어디 계셨나요?’가 그들이 공통적으로 아버지 이대근에게 묻는 질문이다.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며 호통치고 소리지르는 이대근과 막내아들만 감싸고 돈다며 아버지를 비난하는 장남, 종교적 신념 때문에 제사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막내딸의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커져만 간다.
<이대근, 이댁은>은 한국 사회 어딘가에 있음직한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젊은 시절 악극단에서 꿈을 키우다 결국은 도장을 새기며 일생을 보낸 아버지와 막내 동생의 사업 실패로 빚을 떠안게 된 장남과 막내 딸은 접점이 보이지 않는 말다툼을 반복한다. 아버지로서는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 자식들이 못마땅하고, 자식들은 막내아들만 감싸다가 가세를 기울게 한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한국사회 가족의 일면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배우 이대근은 은유의 방식으로 차용된다. 군사정권 시절 강한 남자의 아이콘이었던 이대근은 이제 호통치는 것밖에 모르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를 연기한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가족과 대화하는 법을 몰랐던 아버지, 소통하기보다는 권위만 내세우고 목소리만 키우던 아버지, 자식들을 사랑하면서도 표현하지 못했던 아버지, 늙어서 혼자 남은 후에도 자식과 화해하지 못하고 자꾸 부딪히기만 하는 아버지. 이대근이 연기하는 아버지가 사실적인 것은 영화 속 이대근 가족이 초고속 성장을 이룬 개발도상국 사회가 남긴 쓸쓸한 뒷모습과 일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다.
민복기 원작의 연극 <행복한 가족>을 영화로 옮긴 <이대근, 이댁은>은 제사가 치러지는 장소가 직접적으로 암시하듯 연극적인 성격이 두드러진 작품이다. 구 실장으로 출연한 박원상이 원작 연극의 연출을 맡았고 배우로도 무대에 올랐다. 연극 원작을 영화로 옮겨서인지 <이대근, 이댁은>의 연극적 특성은 매우 두드러진다. 제사를 위해 아들이 빌린 집에서 대다수의 장면이 연출된다는 점이 그렇다.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갈등을 묘사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연극적인 부분이다. 이런 연극적인 설정은 <이대근, 이댁은>에서 영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눈치 빠른 관객이면 알겠지만, 제사 장면에는 반전이 숨어있다. 하지만 결코 반전을 위한 반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제사라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이듯 가족들의 모임도 하나의 제의로서 기능한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이대근 가족을 위한 씻김굿인 셈이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5/1 개봉작리뷰] <아들> - 휴먼드라마와 장진식 코미디의 만남
최근 한국영화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다. 가족과 우아하게 살고 싶어 손에 피묻히는 일도 마다않지만 정작 가족 사이에서는 소외되는 아버지를 그린 <우아한 세계>나 죽어가는 딸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에 초점을 맞춘 <눈부신 날에>, 발달장애 아들을 데리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날아라 허동구>, 젊은 날 호통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던 아버지의 초라한 노년을 그린 <이대근, 이댁은> 등 아버지를 전면에 내세운 가족영화들은 최근 한국영화의 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장진 감독의 <아들>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최근 개봉되는 일련의 아버지 영화 범주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젊은 날 강도 살인을 저지르고 무기수로 15년째 복역중인 이강식(차승원)은 하루 동안의 휴가를 얻게 된다. 강식은 그 하루의 휴가를 세 살 때 이후로 만나지 못한 아들 준석(류덕환)과 만나는 데 쓰려고 한다. 강식은 휴가 일주일 전부터 교도관으로부터 신세대 대화법을 배우는 등 아들을 만날 준비를 한다. 한편 아들 준석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와 만난다는 사실에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드디어 그 날이 오고 강식과 준석은 학교 앞에서 재회한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저녁 식사 후 둘이 함께 산책을 나간 후 서서히 깨지기 시작하고,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온 아버지와 아들처럼 친밀한 사이가 된다. 그러나 그 하룻밤이 지나고 교도소로 복귀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앉은 강식은 배웅을 나온 준석으로부터 엄청난 비밀을 듣게 된다.
<아들>은 장진 감독이 지금까지 만들어온 영화들과 비교하면 다소 뜻밖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진은 데뷔작 <기막한 사내들>부터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아는 여자> <박수칠 때 떠나라> <거룩한 계보>에 이르기까지 관객의 뒷통수를 치는 기발한 상상력과 엇박자의 코미디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온 감독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 잊고 지냈던 정을 회복하는 내용의 휴먼드라마. 설정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아들>은 이처럼 소위 말하는 장진식 영화 스타일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장진 특유의 감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다. 휴먼드라마의 틀거리 안에 장진 감독은 자신의 장기인 엇박자의 코미디를 슬쩍슬쩍 심어놓았다. 그래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 이어지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웃음이 피식피식 비어져나오는 신이 따라나온다.
이런 스타일의 혼합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도, 단점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아들>을 휴먼드라마로만 본다면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스타일이 불만일 수도 있고, 장진식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은 진부한 설정과 마냥 착한 영화의 내용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박수칠 때 떠나라>로 장진 감독과 인연을 맺은 차승원은 15년 동안 꼭꼭 숨겨두었던 부정을 폭발하는 아버지 이강식을 맡아 이름값이 아깝지 않는 연기를 선보이고, <천하장사 마돈나>로 연기에 물이 오른 류덕환은 엄청난 반전의 열쇠를 쥐고 있는 사춘기의 아들 준석을 매끄럽게 소화해낸다. 두 배우의 연기 호흡도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다. 치매 걸린 강식의 어머니를 연기한 김지영과 인정 많은 교도관을 맡은 이상훈도 맛깔스러운 연기로 재미를 더한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5/3 개봉작 리뷰] <쉬즈 더 맨> - 그녀의 완벽한 이중 생활
왈가닥 여고생 바이올라(아만다 바인즈)는 축구를 사랑한다. 땅을 박차며 두 발 끝으로 공을 튀기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 행복하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여자 축구부를 해체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남자 축구부는 괜찮지만 여자 축구부는 더 이상 안 된다는 학교 쪽 통보에 바이올라는 화가 잔뜩 올랐다. 그때 문뜩 바이올라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자기와 쏙 빼닮은 쌍둥이 세바스찬의 학교로 잠입하는 것이다. 새 학기를 시작하지도 않고 음악 한답시고 영국에 가버린 세바스찬 대신 그곳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뛸 생각이다. 자신의 고등학교 축구 라이벌이니 곧 축구로 ‘맞짱’도 뜰 수 있을 터. 여자 축구부를 해체한 데 대한 복수를 확실히 할 수 있다. 문제는 쌍둥이 세바스찬이 남자라는 것. 꼼짝없이 바이올라는 남장을 해야 할 신세가 된다. 그렇게 바이올라의 ‘이중 생활’이 시작된다.
축구를 하고 싶어 남자가 된 여고생 이야기 <쉬즈 더 맨 She’s the Man>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 The Twelfth Night]가 원작이다. 쌍둥이 세바스찬으로 남장한 바이올라를 올리비아 백작부인이 사모하고 오시노 공작이 그런 올리비아 백작부인을 맘에 품는, 그러나 정작 바이올라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시노 공작이란 원작의 ‘복잡한’ 삼각 구도가 그대로 영화로 옮아왔다. 세바스찬의 기숙사로 성큼 걸어 들어간 바이올라의 룸 메이트는 같은 축구부의 듀크(채닝 테이텀). 듀크는 학교 킹카 올리비아(로라 램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눈에 든 건 여느 남자애와 달리 말이 잘 통하는 바이올라다. 그리고 바이올라는 어느덧 듀크에게 조금씩 룸 메이트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다. 현대판 [십이야]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 없는 <쉬즈 더 맨>의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관계망을 그대로 걷어 와 차용하는 건 좋지만 관계를 이루는 각 인물들의 심리 변화는 제대로 옮겨오지 못했다. 여러 에피소드를 거치며 바이올라를 좋아하게 되는 올리비아의 감정은 그나마 이해되지만 듀크를 좋아하게 된 바이올라의 심경 변화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굳이 찾자면 한번의 장난 같은 키스 정도? 그도 아니면 듀크와 함께 살면서 그의 멋진 근육에 마음을 빼앗겼을 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샤워실, 가발, 탐폰 등 남자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간 여학생이란 설정에만 기댄 성의 없는 에피소드들도 영화를 엉성하고 어지럽게 만들었다.
<쉬즈 더 맨>에 힘이 되어 준 건 남장 여고생이 돼야 했던 아만다 바인즈의 호연. 아만다 바인즈는 ‘북 치고 장구 치고’란 말이 무슨 뜻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듯 매 장면, 매 에피소드에 웃음을 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왈가닥 여고생 바이올라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멋있는 남자 듀크 역은 국내에 <스텝 업 Step Up>으로 얼굴을 알린 채닝 테이텀이 맡았다. 잘 만들어진 로맨틱 코미디만을 엄선해 소개한다는 취지로 시작된 ‘무비 온 스타일’ 첫번째 프로그램인 <쉬즈 더 맨>은 무비 온 스타일이 진행되는 메가박스 극장에서만 만나볼 수 있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5/3 개봉작 리뷰] <캐쉬백> - 결정적 순간을 잡아라
미술을 전공하는 대학생 벤(숀 비거스태프)은 얼마 전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리고 곧 사귀게 된 새 친구는 ‘불면증’. 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하루 24시간 중에 단 1분도, 아니 단 1초도 말이다. 그렇게 2주가 흘렀다. 처음엔 잠을 잘 수 없어 괴로웠던 벤은 자신에게 ‘덤’으로 주어진 8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대형 슈퍼마켓 야간 근무. 남들이 잠으로 흘려보낼 8시간을 돈과 맞바꾸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야간 근무 일은 지루하기만 하다. 물론 이건 벤만의 얘기는 아니다. 샤론(에밀리아 폭스)을 비롯한 벤의 동료들은 무료함을 달랠 제 각각의 방법들을 연마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벤은 자신이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시간아 멈춰라’하면 시간이 곧 멈춘다. 정지된 시간 안을 홀로 걸을 수 있는 벤은 그곳에서 멈춰진 순간, 정지된 인물을 곰곰이 관찰하고 그들을 스케치한다. 어느 날 멈춰진 공간을 거닐던 벤의 눈에 동료인 샤론의 모습이 빨려 들어온다.
<캐쉬백 Cashback>은 18분짜리 동명 단편영화에서 시작됐다. 열한 살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해 90년대 후반, 영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패션 사진작가가 된 숀 앨리스가 ‘시간과 아름다움’에 대한 머리 속 그림을 옮긴 단편 <캐쉬백>은 2004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 후보에 오르며 주목 받았다. 단편에 살과 피를 보탰지만 장편 <캐쉬백>을 흐르는 기본 주제는 단편의 큰 맥인 ‘시간과 아름다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사진작가로 살아온 숀 앨리스 감독은 영화에 ‘사진’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가져온다. 시간을 멈추고 순간을 한 장의 정지된 화면 안에 잡아 놓을 수 있는 벤의 능력은 그 자체로 사진이 갖는 능력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벤은 정지된 화면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벤은 멈춰진 순간 안으로 뛰어들어 대상들을 관찰하고, 때론 대상에 변화를 주어 다시 움직이게 될 앞으로의 공간을 조금씩 비틀어 놓는다.
멈춰진 시간 안에서 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아름다움’을 찾는 일이다. 쇼핑 카트를 밀고, 물건을 고르는 이들의 몸이 지닌 아름다움을 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스케치한다. <캐쉬백>은 사진과 그림, 영상 등 인생에서 숱하게 마주치고 또 흘려보내는 ‘결정적 순간들’을 간직하는 수많은 미적 체험을 온몸으로 재현해 보여주고 있다. 자유자재로 조합해낸 시간이 매력적이고 한 컷, 한 신 모두가 아름답지만 <캐쉬백>이 ‘시간과 미(美)’의 문제에 대해 영화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이상을 넘어 관객들로부터 얼만큼 깊이 있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해 ‘1초’의 시간이 갖는 의미를 나름대로 찾아내지만 시간과 아름다움에 관한 본질적인 고민들은 영화에 그리 깊게 드리워 있지 않다.
패션 사진작가란 이름에 걸맞게 <캐쉬백>은 황홀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여체들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벤의 눈동자와 함께 관객 역시 아름다움의 순간들을 체험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가볍게 부수는 영화적 상상력도 <캐쉬백>의 매력 포인트 가운데 하나. 여기에 벤의 슈퍼마켓 동료로 나오는 네 명의 ‘어리버리’ 유머가 영화에 자잘한 코미디를 심어두었다. <해리포터 Harry Potter> 시리즈 1, 2편에서 퀴디치 주장 ‘올리버 우드’ 역을 연기한 숀 비거스태프가 상상력 가득한 청년 벤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 The Pianist>에 출연한 에밀리아 폭스가 벤의 또 다른 사랑 샤론을 연기했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5/3 개봉작리뷰] <마이 베스트 프렌드> - 내 친구는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농담 삼아 이런 말로 남을 놀리곤 한다. ‘그래서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라고.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문득 휴대폰에 빼곡히 저장된 전화번호를 뒤적거리며 ‘누가 진정한 내 친구인가?’ 하고 묻는다. 중년의 골동품 딜러인 이혼남 프랑수아(다니엘 오테이유)도 그 중 한 명이다. 다이어리를 가득 채우는 일정표대로 바쁘게 움직이는 프랑수아는 사람들과의 약속에 파묻혀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조문객이라곤 고작 10여 명에 불과한 한 고객의 장례식에 참석한 프랑수아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친구들의 모임에 나갔다가 ‘너를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동업자인 카트린(줄리 가예)은 10일 안에 진정한 친구를 데려오면 프랑수아가 최근 회사 경비로 경매에서 구입한 골동품 그리스 화병을 주겠다고 내기를 건다. 승리를 자신하던 프랑수아는 친구들의 목록을 뽑고 하나둘 찾아가지만 냉담한 반응에 당황해 한다. 의기소침해진 프랑수아를 자극한 건 다름아닌 택시기사 브뤼노(대니 분). 누구와도 금방 친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브뤼노에게 친구 사귀는 법을 배우던 프랑수아는 내기에서 이길 묘안을 떠올린다.
일생 동안 진정한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들 말한다. 대인관계가 복잡해지고 업무에 빼앗기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현대인들에게 친구 문제는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결혼식 하객 대행이 뉴스에 보도될 정도니 프랑스 파리나 대한민국 서울이나 별 차이는 없는 셈이다. <마이 베스트 프렌드 Mon Meilleur Ami>는 친구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현대인에 대한 우화다. 프랑수에게는 진정한 친구도 없지만, 사실상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도 없다. 이혼 후 아내와는 왕래가 없는 상태이고, 유일한 자식인 딸과도 거의 대화가 없다. 프랑수아에게 친구 만들기 비법을 가르치는 택시기사 브뤼노 역시 별반 다를 게 없다. 처음 만난 사람과도 금방 친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진정한 친구란 없다. 브뤼노에게 충고를 듣건 친구 만들기 비법 강연회에 찾아가건 ‘베스트 프렌드’를 만드는 데 별 도움은 되지 않는다. 프랑수아는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브뤼노를 이용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친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영화 속 그리스 화병에 그려진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은 <마이 베스트 프렌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점이라 말할 수 있다.
<마이 베스트 프렌드>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Le Mari de la Coiffeuse> <걸 온 더 브릿지 La Fille sur le Pont> <친밀한 타인들 Confidences Trop Intimes>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중견 감독 파트리스 르콩트의 2006년 작품이다. 주로 연인들의 심리묘사에 관심을 기울이던 감독은 <마이 베스트 프렌드>에서 외로운 현대인의 초상을 가벼운 터치로 그려낸다. <마이 베스트 프렌드>가 코미디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웃음을 만들어 내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왜곡된 친구의 의미를 꼬집기 때문이다. 프랑수아가 카트린에게 진정한 친구가 있음을 보여주려고 꾸민 연극은 현대인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방식으로 친구를 사귀는지 말해준다. 하지만 친구의 의미에 대해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가는 다른 문제다. 과장 섞인 프랑수아와 장치로서 활용되는 브뤼노의 캐릭터는 복잡미묘한 친구 관계를 다루기엔 너무 도식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선택된 퀴즈 쇼 장면은 극적 장치로서는 훌륭히 기능하지만, 프랑수아와 브뤼노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진정한 친구를 만들기란 브뤼노의 대사처럼 도저히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5/3 개봉작리뷰]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 강충남, 일본에 살다
택시기사 강충남(기시타니 고로)은 재일한국인이다. 술집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기는 하지만 남북통일 문제 같은 것은 그의 관심 밖이다. 동창이 운영하는 택시회사에 운전사로 일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강충남에게 어느 날 미모의 여인 코니(루비 모레노)가 나타난다. 필리핀계 불법이주민 코니는 강충남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접대부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에겐 한없이 사랑스런 여인일 뿐이다. 코니의 마음을 사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사용한 강충남은 결국 그녀와의 동거에 성공하게 된다. 충남과 코니가 연애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는 동안 택시회사에는 커다란 위기가 닥친다. 재정적 위기에 몰린 택시회사 사장이 야쿠자의 돈을 빌려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 필리핀으로 가서 함께 살자는 코니의 제안도, 망해가는 회사를 살리고 싶은 의지도 충남에게는 이제 버거운 일로만 느껴진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All Under the Moon>는 재일한국인 강충남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택시기사 강충남의 이야기가 영화를 이끌어 가고 있지만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한국인의 애환과 설움에만 무게중심을 둔 작품은 아니다. 충남의 애인인 코니는 15살에 필리핀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뒤 시부야 술집을 전전하며 호스티스 생활을 하는 여인이다. 택시회사 동료인 일본인 친구들은 늘 돈이 없어 강충남에게 구걸을 하고, 부인이 집을 떠나 독수공방하고 있는 하층민의 전형이다. 사기를 당해 야쿠자에게 택시회사를 저당 잡히는 사장 세이이치 역시 이들의 삶과 다를 바가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람에 치이고 돈에 치이는 소시민들이며 한 푼이라도 주워 모으며 전전긍긍해 봤자 영원히 비주류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교포 출신인 양석일 작가의 소설 [택시 광조곡]을 원작으로 하고 재일한국인 최양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지만 재일한국인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일본 하층민 등 일본에 사는 아시아인들의 문제와 고민을 동시에 털어 놓고 있다.
<피와 뼈 Blood and Bones> <수>로 최양일 감독의 영화를 먼저 접한 관객이라면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다소 낯설수 있다. 최양일 감독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사방에 튀기는 하드보일드 영화의 대가이기도 하지만 코믹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에도 재능을 보인 감독이기 때문이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한국인, 불법이민자의 무거운 소재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의 일상을 유쾌하게 풀어놓는 소동극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는 엉뚱하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즐비해 있는데 그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물어보는 택시기사 안보다. “내가 지금 어디 있지요?”라고 물어보는 안보의 질문은 최양일 감독이 자신에게 묻는 씁쓸한 농담이기도 하다. 1993년 작인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우리나라에 14년 만에 지각 개봉되는 영화지만 최양일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 준보]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를 1993년 베스트 1위로 선정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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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마지막주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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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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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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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한복판에 3,000년 전의 전설 속 저주가 현실로 나타난다. 전설의 주인공은 형제들과 함께 세상의 모든 왕국을 정복하려던 전사들의 왕이다. 세계 정복을 위해 전쟁과 파괴를 멈추지 않던 왕은 3,000년마다 한 번씩 모든 별이 일직선상에 놓이면 미지의 시간으로 이동하는 문이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왕은 시간의 문을 통해 영생의 몸을 얻게 되지만 형제들은 모두 돌로 변하고 만다. 게다가 시간의 문을 통해 뛰쳐나온 13마리의 괴물은 3,000년이 지난 현재까지 살아서 사람들을 위협한다. 죽을 수도 없는 인간의 몸으로 생을 이어가고 있는 왕은 거대 기업 윈터스 그룹의 총수 맥스 윈터스로 살아가며 실수를 되돌리기 위해 석상이 된 형제들을 하나둘씩 모은다. 닌자거북이 4형제의 임무는 거리 곳곳에 나타나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괴물들을 저지하는 것. 최고의 적수 슈레더가 죽고 난 후 수련을 위해 중앙 아메리카로 원정 훈련을 떠난 레오나르도는 닌자거북이들의 든든한 조력자인 에이프릴의 부탁으로 다시 형제들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윈터스와 다시 깨어난 형제 전사들 사이의 갈등에 얽히게 된 닌자거북이 형제들은 전설의 저주를 풀기 위해 다시 힘을 모은다.
애니메이션 <닌자거북이 Teenage Mutant Ninja Turtles>가 세상에 나온 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1987년 TV용으로 제작된 2D <닌자거북이>는 TV시리즈와 극장판 장편 애니메이션, 비디오용 애니메이션 등을 거쳐 20년 만에 3D로 다시 태어났다. 뉴욕의 고층 빌딩들 사이로 자유롭게 점프하는 닌자거북이들의 활약상은 3D의 기술력과 함께 한층 입체적이고 스펙터클하게 묘사된다. 영화 초반부를 장식하는 3,000년 전 전사들의 전투 장면은 마치 고성능 PC 게임을 보는 듯한 착각을 안겨준다. 닌자거북이 형제에 대한 미국인의 애정은 <300>을 누르고 전미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특히 이번 3D 극장판에는 <매트릭스 Matrix> 시리즈의 로렌스 피시번, <그루지 Grudge>의 사라 미셸 겔러, <판타스틱 4 Fantastic Four>의 크리스 에반스, <게이샤의 추억 Memoirs of a Geisha>의 장쯔이 등이 목소리 연기자로 참여했다. <닌자거북이 TMNT>는 케빈 먼로 감독의 극장판 장편 애니메이션 데뷔작이며, 먼로 감독은 2008년 개봉을 앞두고 있는 <독수리 오형제 Gatchaman>의 연출을 맡고 있다.
<닌자거북이 TMNT>는 전형적인 10대(흑은 그 미만) 취향 애니메이션이다. 친숙한 캐릭터와 3D 기술을 활용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익숙한 구도의 대결구도를 내세운다. 비밀리에 도시의 범죄를 소탕하는 와처맨으로 변신한 라파엘이나 컴퓨터 수리를 업으로 삼으며 문의전화에 시달리는 도나텔로 등 닌자거북이들의 변화상도 재미있고, 닌자거북이들의 적이었다가 해결사로 일하고 있는 닌자조직 ‘풋 클랜’의 두목 카라이의 변화상도 팬들의 관심을 끈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러티브 짜임새는 평범하고 헐겁다. 닌자거북이와 악당 패거리들 사이의 긴장감도 이야기에 추진력을 불어넣을 정도가 안 되며, 레오나르도가 전지훈련을 떠나면서 생긴 거북이 형제들간의 갈등도 그다지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슈퍼히어로 영화들의 진부한 외형만 반복하는 셈이다. 2D 시절 작품들의 유머와 흥미로운 요소를 더 이상 살려내지 못하는 것이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작품이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26 개봉작 리뷰]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 - 아내의 정부와 떠나는 로드무비
바람난 아내 때문에 속을 태우는 한 남자가 있다. 소심하기 이를 때 없는 주인공 태한(박광정)은 아내에게 이렇다 할 분노를 터뜨리지도 못한채 끙끙 앓다가 화병이라도 생길 지경이다. 아내의 정부이자 택시기사인 중식(정보석)을 찾는데 성공한 태한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강원도 낙산까지 장거리 운행을 제안한다. 강원도로 향하는 태한의 여정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식은 세상에 사랑만 있을 뿐 불륜은 없다며 태한의 속을 박박 긁어 놓기도 하고, 산 중턱에서 차가 고장나 뜻하지 않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한다. 여행의 종착지는 태한의 집 근처로 중식은 이 사실도 모른 채 태한의 아내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동안 태한은 불륜 현장을 덮쳐 이 둘을 요절낼 순간을 기다려왔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아내의 정부와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상한 방식의 로드무비다. 영화는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개성강한 두 인물의 신경전을 통해 치졸한 욕망과 힘 싸움을 유머러스하게 그리는데 방점을 찍는다. 주인공 태한과 아내의 정부 중식은 극명하게 대조되는 캐릭터다. 항상 자신감에 넘치는 중식은 다방 종업원, 태한의 아내 등 만나는 여자마다 추파를 던지는 사람이며, 태한은 불륜현장을 목격하고도 고작 아내의 사진에 껌이나 붙이는 소심한 인물이다. 두 인물의 상이한 성격은 폭포수에서 함께 수영을 하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중식은 개울을 휘저으며 수영을 즐기기 바쁘지만 깡마른 체구의 태한은 주눅이 들어 물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의 태한이 중식의 아내와 잠자리에 드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상황은 역전된다. 영화는 서로 다른 듯 보이던 두 인물이 서로 같은 감정과 욕망을 가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인물과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 풍성한 표현법이 돋보인다. 태한의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극단적인 클로즈업도 마다하지 않고, 아지랑이 사이로 여인이 나타나거나 수십 개의 수박이 고속도로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등 초현실적인 수법도 과감하게 사용된다. <넘버3>에서 얼치기 시인 랭보, <자귀모>에서 사람 잡는 귀신 등 개성강한 감초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박광정이 데뷔 15년 만에 주연을 맡았고, <오! 수정>, 드라마 <대조영> 등 영화와 TV를 넘나들며 폭넓은 활동을 보여온 정보석이 뻔뻔한 택시기사 중식 역을 맡아 호연을 펼친다.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는 김태식 감독이 영화계 입문한지 19년 만에 내놓는 장편 데뷔작이며,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경쟁부문에 상영됐고 2007년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경쟁부문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26 개봉작리뷰] <날아라 허동구> - 동구는 초등학교가 필요해
통닭집을 운영하고 있는 허진규(정진영)에겐 11살 난 아들 동구(최우혁)가 있다. IQ 60인 동구는 발달장애 소년이지만 허진규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인다. 변변한 친구가 없어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오고, 반 평균을 깎아 내린다는 이유로 시험도 치를 수 없던 동구는 어느 날 주전자에 개구리를 넣었다는 오해를 산다. 이 사건을 빌미로 학교는 동구를 특수 학교로 전학시키려 하고, 집주인은 진규에게 이사를 가라고 통보한다. 때마침 진규는 선수 부족으로 해체 위기에 처한 야구부에 동구가 선수로 활동하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날아라 허동구>는 대만동화 [나는 백치다]를 영화화한 작품. 발달장애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동화 [나는 백치다]와 맥을 같이 하지만, 억척스런 엄마를 평범한 아빠로 바꾸고 초등학교 졸업을 놓고 벌어지는 허진규, 허동구 부자(父子)의 고군분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동구가 학교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친구들에게 물을 따라주는 일뿐이지만 영화는 이런 발달장애 소년을 연민의 시선으로 그리지 않는다. 동구는 심장병을 앓고 있는 짝을 위해 운동장 두 바퀴를 도는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최대 난적은 새로 설치되어 자신의 일을 빼앗아 버린 정수기가 전부다. 허동구가 야구시합에서 유일하게 출루할 수 있는 방법은 번트뿐이다. 동구는 호쾌한 홈런을 날릴 수는 없지만, 한 루씩 한 루씩 천천히 베이스를 밟아가며 홈으로 돌아오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날아라 허동구>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가슴 먹먹한 부자간의 사랑이야기를 풀어내 이야기의 설득력을 더한다. 아버지는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동구를 위해 숫자를 세주곤 하지만 아버지의 친구 상철은 이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허진규는 20년 가까이 살아온 집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보다 이사를 하게 되면 집까지 찾아 오는 데 고생하게 될 동구를 더 걱정한다. 발달장애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 허진규를 맡은 정진영과 코믹한 역할을 맡고 있는 야구부 코치 권오중의 연기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도 <날아라 허동구>는 아이큐 60의 소년 동구를 연기한 최우혁의 호연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안녕, 형아> <파랑주의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아역배우 최우혁은 어수룩하지만 사랑스런 캐릭터 동구를 완벽하게 소화해 낸다. <날아라 허동구>는 <달마야 놀자> <북경반점>의 각본을 맡았던 박규태 감독의 데뷔작이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26 개봉작 리뷰] <숨> - 김기덕의 익숙하고도 낯선 세계
여기 죽음을 바라는 남자가 있다. 사형수 장진(장첸)은 어느 날, 날카로운 송곳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감행한다. 죽음이 찾아와 자신을 옭아매기 전에 제 손으로 죽음에 다가가고 싶다. TV 뉴스를 통해 장진의 연이은 자살 시도를 접한 연(지아)은 불현듯 그를 만나기로 마음 먹는다. 사형 집행이 며칠 남지 않은 장진에게 사계절을, 1년이란 시간을 선물로 주고 싶기 때문이다. 교도소 면회실 한 구석에서 그렇게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교도소 회색 페인트 벽은 그들의 만남이 계속되는 사이 봄에서 여름으로, 또 가을에서 겨울로 옷을 갈아 입는다. 그리고 그 사이, 딴 여자와 바람난 연의 남편(하정우)은 아내가 평소의 모습과 다르다는 걸 알아 차린다.
김기덕의 열네 번째 연출작 <숨>에는 지금까지의 김기덕 영화들이 고스란히 숨쉬고 있다. 몇 주 뒤면 사형을 선고 받을 장진에게 사계절을 선물하는 연의 퍼포먼스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장진을 위해 사계절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연의 얼굴 위론 <빈집>의 ‘태석’이 겹쳐 보이고, 죽음에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지만 정작 죽음을 눈 앞에 뒀을 땐 살기 위해 맹렬히 발버둥치는 장진의 모습에선 자연스레 <악어>의 ‘용패’가 떠오른다. 이 뿐 아니다. <활>과 <시간>에서 고심한 ‘시간’과 ‘순환’에 관한 고민들이 <숨>에도 고스란히 녹아 들어 있다. 하지만 <숨>이 김기덕 전작들의 짜깁기란 것은 아니다. 짜깁기보단 오히려 유쾌한 변주곡에 더 가깝다. 장진에게 사계절을 선물하기로 마음 먹은 연은 면회실을 계절 빛으로 물든 종이로 도배하고 계절에 맞는 노래를 부른다. 퍼포먼스, 뮤지컬과 같은 연의 이런 행동들은 ‘날 것’에 가까울 만큼 단도직입적이던 김기덕의 ‘영화 어투’를 한결 부드럽게 감싼다. 연과 장진의 면회를 주관하고 관리하며 통제하는 보안과장의 존재는 둘의 관계에서 절대자의 시선으로 작용함과 동시에 <숨>을 ‘영화에 관한 영화’로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유머가 깊어지고 상상력이 빛나는 것도, 영화의 표현 방식이 한결 쉽고 편안해 진 것도 맞지만 <숨>이 그리는 세계가 마냥 폭신한 것인지에 관한 판단은 전적으로 관객 몫이다. 대화의 기술은 한결 부드러워졌지만 <숨>에는 김기덕의 어떤 전작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강한 죽음의 매혹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과 달리 장진은 겨울을 지나 다시 돌아오는 봄을 맞지 못하고, 연과 남편의 화해에도 불안한 기운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다.
지난해 <시간> 개봉과 맞물려 있었던 김기덕 감독의 여러 발언은 진심과 오해, 왜곡 사이에서 숱한 논란을 낳았고 덕분에 <숨>은 개봉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하지만 ‘탈’보다는 성과가 더 큰 듯하다. 김기덕 감독을 믿고 <쓰리타임즈 Three Times>의 배우 장첸을 비롯한 ‘김기덕의 배우’ 지아와 하정우가 기꺼이 함께 한 <숨>은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스, 이탈리아, 멕시코 등에 선판매 됐다. 그 돈을 모아 10회차 촬영, 3억 7천여 원의 ‘싼’ 제작비로 완성된 <숨>은 오는 5월 열리는 60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진출했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4/26 개봉작 리뷰] <더블타겟> - 위험한 패트리어트 게임
실수로 동료를 잃은 후 은닉 생활을 하고 있는 전직 특수부대 출신의 저격수 밥 리 스웨거(마크 월버그)는 정부 고위 관계자인 존슨 대령(대니 글로버)으로부터 대통령을 저격하려는 음모를 막아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스웨거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로 미리 범행장소와 방법 등을 알아낸다. 그러나 대통령 암살 에정일, 오히려 스웨거가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범인으로 몰리게 된다.
<트레이닝 데이 Training Day> <킹 아더 King Arthur>의 안톤 후쿠아 감독의 2007년작 <더블타겟 Shooter>은 흡사 <도망자 The Fugitive>의 리차드 킴블 박사처럼 절대절명의 위기에 몰린 주인공이 자신의 무죄를 되찾는 과정을 그린 액션 스릴러 영화다. 하지만 <도망자>에 비해 <더블타겟>은 훨씬 스케일이 커졌다. 조국에 대한 애국심의 화신인 주인공 밥 리 스웨거가 조국의 대통령 암살범으로 몰리게 되는 기막힌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그러나 그다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비록 초반에 위기에 몰리기는 하지만 <더블타겟>의 밥 리 스웨거는 기막힌 사격술에 명석한 두뇌, 거기에 뇌쇄적인 근육질 몸매로 다져진 '선한 미국인'을 대표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밥 리 스웨거 역할은 <이탈리안 잡 The Italian Job> <디파티드 The Departed>의 마크 월버그가 맡았다. 마크 월버그는 혹독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다진 미국 특전사로서의 외형적인 면모를 뽐낸다.
<더블타겟>은 미국 [워싱턴 포스트]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스티븐 헌터의 베스트셀러 [포인트 오브 임팩트 Point of Impact]를 원작으로 한다. 미국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퓰리쳐상을 수상한 [포인트 오브 임팩트]는 이후 [블랙 라이트 Black Light] [타임 투 헌트 Time to Hunt] 등 계속된 시리즈 출간으로 이어졌다. 영화는 원작의 촘촘한 플롯과 서스펜스 구조에 안톤 후쿠아 특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더해, 팝콘 무비로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는 액션 스릴러로 완성되었다. 하지만 '삐까'한 스타일에 비해 <더블타겟>의 이야기는 1980년대 유행한 <람보 Rambo> 류의 친미 액션물의 그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선한 미국인의 손에 의해 악은 차례로 처단되고 제자리를 찾는다. 문제는, 그의 처단 방식이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애국심에서 기인한 사적 처단이라는 것이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반복되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공식이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26개봉작 리뷰] <스토리 오브 오: 은밀한 쾌락> - 구태의연한 B급 에로영화
누드사진을 찍는 사진작가 ‘오’는 남자친구 르네와 사귀고 있지만 늘 알 수 없는 결핍을 느끼고 있다. 성적 욕망을 담은 누드사진과 자신의 육체적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은 연인인 르네도 채워줄 수가 없다. 여자친구의 갈망을 해소시켜주고자 르네는 오를 특별한 곳으로 데려간다. 오는 르네와 함께 방문한 곳에서 특별하고 자극적인 성적 판타지를 경험하고 이를 책으로 써내려 간다. 르네는 오를 위해 한 단계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스티븐 박사를 소개한다. 부와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스티븐 박사는 오에게 서로간의 성적 쾌락을 최대화할 수 있는 계약을 제안하고, 오는 스티븐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성적 판타지를 현실로 경험하게 된다. 스티븐 박사와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오는 점점 변태적인 사도마조히즘으로 가득한 세계에 익숙해져 간다.
<스토리 오브 오: 은밀한 쾌락 Story of O: Untold Pleasures>은 프랑스의 여류 작가 안 데스클로의 소설 [스토리 오브 오 Story of O]의 영화 버전이다. 도미니크 오리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했던 데스클로가 폴린 레아주라는 필명으로 1954년에 발표한 [스토리 오브 오]는 파격적인 성애 묘사로 발간 당시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에서 금서 목록에 올랐던 것은 당연한 일. 양성애자였던 데스클로는 [스토리 오브 오]가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이 작가임을 밝히기도 했다. 에로티시즘 소설의 고전으로 불리는 [스토리 오브 오]는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 Emmanuelle>로 유명한 프랑스 감독 쥐스트 자캥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다. <스토리 오브 오: 은밀한 쾌락>은 B급 영화들만 주로 찍어온 필 레어니스 감독의 2002년 작품이다. 소설 출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가학적 성행위와 구강 및 항문성교 묘사가 영화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국내에서는 이른바 합법적 ‘야동’인 셈이다. 원작소설의 상황들을 현재의 미국으로 옮겨와 상업적 에로티시즘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소설이 출간된 지 50년이 지나고 영화화가 반복되면서 소재 자체의 신선도는 떨어지지만, 성적 묘사는 변함없이 자극적이다. 인터넷을 떠도는 포르노그라피만큼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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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서 사는 백수 건달 우종대(박신양)는 친구 동수(류승수)가 하는 야바위판에 바람잡이를 하던 중 고등학생들과 싸움이 붙어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교도소행 직전의 종대를 찾아간 사회복지사 선영(예지원)은 합의를 대신 해주는 조건으로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보육원에서 지내다 입양되기 직전인 일곱 살배기 딸 준에게 편지를 써달라는 것이다. 선영은 컨테이너로 돌아간 종대를 다시 찾아가 필요한 만큼의 돈을 줄 테니 준과 몇 달만 같이 지내달라고 부탁한다. 준을 딸로 받아들이지 않던 종대는 오로지 돈을 위해 준과 함께 지내기로 약속하고 원치 않는 동거를 시작한다. 준의 소원은 종대와 함께 월드컵 경기를 보는 것. 하지만 당장 돈이 급한 종대에게 준과 지내는 일은 귀찮기만 하다. 불법 투견장을 운영하는 조직의 소싸움판 사기 도박에 가담한 종대는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위험한 처지에 몰린다. 여기에 동수의 배신은 종대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고, 불치병을 앓던 준은 종대가 시키는 대로 컨테이터 위로 올라가 안테나를 잡고 있던 중 비바람을 맞고 쓰러진다.
관습적인 과장을 배제한 신파극 <눈부신 날에>는 뜻밖에도 <이재수의 난>을 연출한 박광수 감독의 신작이다.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박광수 감독은 일관성 있게 다뤘던 사회적·역사적 이슈 대신 따뜻하고도 슬픈 가족 이야기를 <이재수의 난>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의 소재로 삼았다.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전 영화들과 맥락을 함께 하지만 영화의 핵심 키워드는 명백히 가족이다. 다만 일반 가족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혈연 중심의 일반적 가족 형태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차원에서 사랑과 속죄, 구원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다. 선영과 준의 관계가 그렇고 종대와 준의 관계가 그렇다. 인생 막장에 다다른 것과 다름없는 종대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준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라면 준은 종대에게 구원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사회적 이슈를 다뤄 온 중견 감독에게 <눈부신 날에>는 다소 의외의 작품이다. 비록 근원적인 부분에서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다 하지만, 형식상 고전 신파극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백수 건달이 자신의 딸이라고 찾아온 어린 소녀가 불치병으로 죽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설정은 가족이라는 한정된 인물군에 초점을 맞추고 죽음의 과정까지 안내하는 여타 신파 가족극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슬픔을 강요하기 위한 관습적 장치를 과하지 않게 사용했다는 점에서 구닥다리 신파극과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불치병에 걸린 준이 주인공 종대에 비해 비중이 적으며 간헐적인 관찰의 대상이라는 점도 일반적인 신파극과 다른 점이다. 관객은 준의 시선을 따라가기보다는 종대의 시선을 좇아가게 된다. 종대의 삼류인생을 비추는 동안 준은 내러티브에서 소외되는 결과를 낳는다. 신파 드라마와 인간 드라마 사이에서 오가는 동안 영화는 별다른 사건도, 감정적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고 영화의 절반을 마친다. 종대와 준의 관계보다는 종대의 험난한 삶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둔 탓이다. 이것이 <눈부신 날에>의 장르를 가족 드라마라 말하기도 모호하고 인간 드라마로 포함시키기도 힘들게 만드는 이유다. 준과 종대가 처한 현실이 2002년 한일월드컵의 열기와 먼 것처럼 <눈부신 날에>의 사회적·종교적 메시지는 신파극의 최루성과 쉽사리 연결되지 못한다. <눈부신 날에>는 눈물도 감동도 강렬한 메시지도 전하지 않는 참 애매한 영화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굿 셰퍼드> - 이 남자가 사는 법
1961년 4월 쿠바의 반 혁명군 침공 작전에 실패한 미국 정부는 CIA 내부 첩자로 인해 정보가 유출되었음을 알게 되고,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CIA는 내부 첩자를 비밀리에 조사하기 시작한다. 명문가 출신으로 예일대 재학 중 비밀 서클인 'Skull and Bones'에 가입한 후 첩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베테랑 요원 에드워드 윌슨(맷 데이먼)도 예외는 아니다. 에드워드는 CIA 초창기부터 첩보 업무를 담당해 온 베테랑 요원으로, 어느날 그에게 익명의 녹음 테이프와 흑백 사진이 도착한다. 첩자를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이 증거물의 정체를 밝혀나가면서, 에드워드는 자신의 CIA 활동을 거슬러 올라간다.
<굿 셰퍼드 The Good Shepherd>는 지난 1993년 <브롱크스 이야기 A Bronx Tale>로 성공적으로 감독 자리에 올라선 로버트 드 니로가 13년만에 내놓은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브롱크스 이야기>가 1960년대 뉴욕 브롱크스 무대의 갱스터의 이야기였다면 <굿 셰퍼드>는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까지의 미국의 지나간 역사에 시선을 돌리는 작품이다. 맷 데이먼이 연기하는 에드워드 윌슨은 1954년부터 74년까지 CIA에서 근무한 실존인물 제임스 앤젤톤에 토대를 두고 창조된 캐릭터다. <굿 셰퍼드>는 30년 남짓한 세월 동안 에드워드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며, CIA의 탄생과 몰락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첩보 세계의 추악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굿 셰퍼드>의 각본을 담당한 사람은 <포레스트 검프 Forrest Gump> <인사이더 The Insider> 등 미국 역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에서 장기를 보인 에릭 로스. 철저한 시대 고증 작업을 거쳐 <굿 셰퍼드>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미국의 이면을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러닝타임 167분 내내 영화의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에드워드 역의 맷 데이먼의 연기는 기본 이상이다. 그는 어린 시절 경험한 아픈 기억으로 인해 나락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30년 동안의 삶을 치밀하게 연기한다. 그 외에 안젤리나 졸리, 윌리암 허트, 존 터투로, 알렉 볼드윈, 마이클 갬본, 빌리 크루덥 등 더이상 화려할 수 없는 일급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 또한 <굿 셰퍼드>에 힘을 실어준다. 하지만 편집, 촬영, 의상, 미술 등 최고의 테크니션들로 가득한 영화지만, 감독 로버트 드 니로의 연출력은 다소 평범하다. 그는 당시 미국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첩보 세계의 이면을 보여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167분 만연체의 리듬을 타고 여러 차례 공명하는 데 그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열두 살 소년 루이스의 첫 번째 소원은 친어머니를 찾는 것이다. 입양을 신청한 부모들과 수십 차례 만나보기도 하지만, 취미로 만든 발명품을 자랑하다 번번이 사고만 쳐서 계속 고아원에 남아있는 처지가 된다. 같은 방 친구 굽의 밤잠을 방해하면서 완성한 루이스의 최근 발명품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메모리 스캐너. 어린이 발명대회에 참가한 루이스는 미래에서 왔다는 소년 윌버 로빈슨으로부터 악당 모자맨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듣는다. 모자맨이 꾸민 계략에 휘말려 메모리 스캐너를 빼앗긴 루이스는 발명품을 되찾기 위해 윌버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 세계로 떠난다. 윌버 로빈슨의 가족은 개성이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독특하다. 개구리를 연습시켜 오케스트라를 만든 엄마, 옷을 뒤집어 입은 채 틀니를 찾아 집안을 헤매는 할아버지, 디스코 댄스에 심취한 할머니, 손가락 인형을 아내로 삼아 대화를 나누는 삼촌, 어릴 적부터 장난감을 좋아해 어른이 돼서도 기차를 집안에서 가지고 노는 고모, 프로펠러가 달린 헬멧을 쓰고 날아다니며 벽화를 그리는 사촌 등 대가족 로빈슨 패밀리는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도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 아래 메모리 스캐너를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던 윌버는 모자맨의 정체를 알아내고 깜짝 놀란다.
디즈니가 100퍼센트 컴퓨터 그래픽으로 제작한 첫 번째 3D 애니메이션 <치킨 리틀 Chicken Little>은 흥행에서는 꽤나 성공했지만 작품 자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고전적 방식의 2D를 버린 디즈니는 자사의 전통적인 2D 애니메이션의 장점과 제휴사 픽사의 장점을 결합하려 했으나 <치킨 리틀>은 적절한 모범으로 남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로빈슨 가족 Meet the Robinsons>은 디즈니의 두 번째 3D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픽사와 합병한 후 내놓은 첫 번째 작품이다. 디즈니 출신으로 픽사에 몸담으며 <토이 스토리 Toy Story> 시리즈와 <벅스 라이프 A Bug's Life> <카 Cars> 등을 감독하고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 <인크레더블 The Incredibles>를 제작한 존 라세터가 디즈니로 옮겨 처음으로 제작을 맡았다. <로빈슨 가족>은 <치킨 리틀>에 비해 디즈니와 픽사의 조화가 잘 이뤄진 작품이다. 영화 끝머리에 나오는 월트 디즈니의 말인 '계속 전진하라(keep moving forward)'에서 알 수 있듯 디즈니의 변화를 알리는 작품이기도 하다.
<로빈슨 가족>의 원작은 윌리엄 조이스의 삽화 동화 [윌버 로빈슨과의 하루 A Day with Wilbur Robinson]이지만, 주인공 소년이 윌버 로빈슨의 집에 놀러가서 독특한 개성의 가족들을 만난다는 것 외에는 많은 것이 다르다. 소년의 이름이 루이스이고 발명이 취미인 고아라는 점, 미래에서 온 윌버를 따라 자신의 발명품을 훔쳐간 모자맨을 추적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한다는 점 등이 새롭게 첨가됐다. 영화에서 로빈슨 가족의 역할은 동화의 그것에 비해 크게 축소됐다.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임무를 다할 뿐 루이스가 엄마를 찾는 데 있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캐릭터의 특성만으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법하지만, 로빈슨 가족은 결말에서 제시되는 가족주의의 행복한 외형으로만 기능한다. 이것은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가족주의의 실현이라는 디즈니의 전통적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다행히 <로빈슨 가족>이 진부한 가치관과 이야기로 일관하는 작품이 되지 않은 것은 픽사에서 영향받은 듯한 현대적인 감각 때문이다. 다분히 평면적이고 단순한 디즈니의 캐릭터들과 달리 <로빈슨 가족>의 캐릭터들은 입체적이고 다양하며 개성이 넘친다. 기발한 상상력과 역동적인 어드벤처 역시 픽사 애니메이션의 특징이다. 비록 픽사의 성공작들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로빈슨 가족>은 픽사와 디즈니의 성공적인 합병을 알리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 - 기획영화의 모범답안 혹은 한계
사랑하는 남자를 찾아 홀홀단신 한국행을 감행한 재일교포 준코(이청아). 하지만 한국에서의 삶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기만 하다. 정신이 반쯤은 나가 있는 듯한 게스트하우스의 학생들, 게다가 주인집 아들인 종만(박기웅)은 준코를 잡아 먹지 못해 안달이다. 이를 견디다 못해 게스트 하우스를 나가려던 준코는 게스트 하우스 주인으로부터 특별 한국어 과외를 주선받는데, 과외 선생은 다름 아닌 그의 아들인 종만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 레슨 2>(이하 '동갑내기 2')는 지난 2003년 개봉되어 전국 500만 관객을 동원한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4년만의 속편이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멜로와 코미디, 개그를 버무린 기획 영화. 영화의 두 주연인 권상우와 김하늘 사이에서 일어난 화학반응을 통해 흥행에 성공한 2003년 상반기의 최고 슬리퍼 히트작이다. <동갑내기 2>는 기본적으로 1편의 흥행 포인트를 충실하게 따른다. 초반부는 얼떨결에 스승과 제자의 위치에 처한 두 남녀의 좌충우돌기. 한국말이 서툰 재일교포 준코와 뚜렷한 삶의 목표도 가치관도 없는 '날라리' 대학생 종만이 서로 얽히고 설키게 되는 과정을 빠르고 경쾌한 호흡으로 풀어낸다. 물론 중반 이후는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갖게 되는 종만과 준코의 멜로 라인으로, 영화는 예정된 해피엔딩으로 급하게 나아간다.
등장 인물과 설정 등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갑내기 2>는 1편을 철저히 벤치마킹한 영화다. 바로 이 점에서 <동갑내기 2>의 한계점이 발견된다. 철지난 개그 프로의 재방송을 보는 듯, 이미 한 번 재미를 본 기획 요소의 재탕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편이 만화적인 상상과 이모티콘의 적절한 사용, 두 주인공의 연기 호흡에 기초하여 성공적인 캐릭터 코미디로 나아갔다면, <동갑내기 2>는 철저히 말장난과 음담패설에만 기댄다. 작년 초 '맷돌춤' 광고로 스타덤에 오른 신예 박기웅과 <늑대의 유혹> 이청아의 연기 호흡은 그럭저럭 볼만은 하지만, 원조 권상우와 김하늘의 그것에는 감히 미치지 못한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하나> - 복수보다는 피스~
태평천국 에도시대.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쇼군으로 즉위한 후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지만 무사들은 칼을 쓰는 일이 없어지자 무력감에 빠진다. 동물을 우대하는 정책 때문에 오히려 사람이 개보다 천대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에도시대가 시작된 지 85년이 지난 1688년부터 1704년까지 계속된 켄로쿠시대에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1701년 3월 에도성에서 아코의 번주가 막부의 실세 키라에게 칼을 휘두르는 불상사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아코의 번주는 할복을 명령받았고 번에 속해 있던 47인의 사무라이들이 주군의 복수를 위해 이듬해 12월 새벽 키라를 습격한다. 47인의 무사는 결국 모두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코사건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추신구라사건은 일본사람들이 가장 즐겨 듣는 이야기 중 하나로 미조구치 겐지의 <겐로쿠 추신구라 The 47 Ronin>, <47인의 자객 47 Ronin> 등으로 영화화됐고, 얼마 전 키무라 타쿠야 주연의 TV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다.
<하나 Hana Yori Mo Naho>의 배경은 추신구라사건의 한복판인 1702년이다. 역사적 사건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하나>는 직접적으로 추신구라사건과 관련이 없는 작품이다. 가끔 사건의 내용이 언급되기도 하고 작품의 마지막에는 47인 중의 한 낭인(주군을 잃고 떠도는 사무라이)이 습격에 가담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영화의 중심 줄거리는 추신구라사건과 알레고리로 연결되는 한 사무라이 청년의 복수극이다. 사무라이가 주인공이긴 하지만 <하나>에는 칼을 들고 격투하는 장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액션 활극을 기대하고 이 영화를 봤다가는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하나>는 추신구라사건의 본질인 맹목적인 충성과 복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난 소자(오카다 준이치)는 원수가 살고 있는 에도의 한 마을에 정착한다. 도대체 실전 경험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젊은 사무라이 소자는 마을에 자리를 잡은 후 복수보다는 어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데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게다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옆집 미망인 오사에(미야자와 리에)는 소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며 복수의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
오랜 기다림 끝에 아버지를 죽인 카나자와(아사노 타다노부)를 찾아낸 소자는 가족과 함께 평범하게 살고 있는 원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껄렁껄렁한 백수건달 소데키치(카세 료)에게 얻어터질 정도로 소자의 실력 또한 형편없다. 이쯤 되니 마을 사람들도 복수는 어림도 없다며 소자를 말린다. 마을 사람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며 생각을 바꾼 소자는 복수 대신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맹목적인 사무라이 정신과 복수의 시대에 오히려 반대의 지점에 위치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하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9.11 사건과 그로 인해 변한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다.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이야기와 장르를 반대의 시각으로 전복시켜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추신구라사건의 핵심 키워드인 할복마저도 <하나>에서는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한 의식으로 풍자된다. 이는 <원더풀 라이프 Wonderful Life> <디스턴스 Distance>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등을 통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드러냈던 삶에 대한 따뜻한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삶의 아이러니와 모순 속에서 끌어낸 유머를 곳곳에 배치해 코미디 영화 같은 외양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소자와 카나자와가 서로 고개를 숙이고 마주하는 장면과 47인의 낭인 중 한 명이었던 키치에몬(테라지마 스스무)이 마을 사람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아들과의 삶을 택하는 장면은 <하나>가 말하는 바를 핵심적으로 전달한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표피적인 특징과 요란한 시대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는 소자를 포함한 빈민구역 소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관찰하며 느긋하게 러닝타임을 채운다. 떠들썩한 추신구라사건과 달리 마을사람들에게 생기는 일은 지극히 지엽적이고 개인적이다. 대의적 명분보다는 개인과 가족, 마을의 평안과 안녕이 우선이다. 감독은 그 속에서 평화의 가치를 찾고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한다. 코미디라는 장르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밝고 따뜻한 시각을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일 뿐이지 영화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아니다. 사무라이 영화라는 장르의 관습적 쾌락을 배반한 채 공시적 가치를 통시적 가치로 재해석하는 감독의 철학을 읽을 때 <하나>를 보는 즐거움은 두 배가 된다. 영화 속 대사처럼 누군가는 "사무라이는 벚꽃처럼 미련 없이 최후를 맞이하는 존재"라고 말하겠지만,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인 마고의 입을 빌려 "내년에 다시 필 것을 알기에 지는 벚꽃이 아름다운 법"이라고 말한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19 개봉작 리뷰] <선샤인> - 태양을 쏴라
지구에 또 한번의 빙하기가 찾아온다. 때는 2057년, 태양이 열기를 잃고 식어가자 지구에도 한파가 몰아 닥친다. 태양을 다시 불 타오르게 하기 위해 8명의 대원이 우주선에 몸을 싣는다. 표면에 핵 폭탄을 발사해 태양이 다시 끓어오르게 하려는 임무를 띤 ‘이카루스 2호’의 우주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긴 비행 끝에 태양에 근접하게 된 순간, 이카루스 2호는 광활한 우주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신호와 만난다. 7년 전 이 길을 똑같이 지났을 조난된 우주선, 이카루스 1호가 보내는 조난 구호다. 1호 우주선이 갖고 있는 핵탄두까지 함께 태양에 던질 수 있다면 태양이 살아날 확률은 더욱 높아질 터. 핵물리학자 캐파(킬리언 머피)의 이러한 판단 아래 이카루스 2호는 1호가 있는 곳으로 궤도를 수정한다.
<28일 후… 28 Days Later…>의 멤버들이 <선샤인 Sunshine>에 또 다시 모였다. 대니 보일 감독과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각본가 알렉스 갈랜드와 제작자 앤드류 맥도널드까지 <28일 후…>의 핵심 멤버가 고스란히 넘어와 다시 한번 종말 직전의 인류를 그린다. 분노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의 마지막 날들을 그린 <28일 후…>가 ‘인류 최후의 날’ 호러 좀비 버전이라면 <선샤인>은 SF 버전이라 할 만하다. 태양을 구해낼 목적으로 떠난 이카루스 2호는 이글거리는 태양은 물론 수성을 비롯한 숱한 우주 광경을 펼쳐 보인다. 실제 <선샤인> 제작팀이 가장 큰 공을 들인 건 우주선의 안팎을 포함한 우주 풍경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 태양의 실제 온도와 반사각도를 계산해 만든 미니어처와 CG로 태양 이미지를 그려내고, 우주선 내부의 생생한 그림을 얻어내기 위해 런던 동부에 대규모 세트를 세웠다. 우주선 내부 신들 모두 세트에서 직접 촬영한 반면, 외부 모습들은 미니어처를 만들어 CG로 합성하고 재조합 하며 영상에 공을 들였다.
이글거리는 태양 불꽃을 선보이는 <선샤인>은 분명 어떤 SF 영화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생생한 영상미를 자랑한다. 하지만 식어가는 태양을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난 한 무리의 대원이라는 흥미로운 설정을 영화는 끝까지 흥미롭게 끌어가지 못한다. 이카루스 1호의 조난 구호를 받고 궤도를 옮기기까지의 초반은 흥미진진하다. 대원 각각의 엇갈리는 의견에 따라 갈등이 이어지고, 또 갈등을 봉합해가는 과정이 긴장 어린 드라마를 이룬다. 우연한 화재 사고로 대량의 산소를 잃게 되자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는 상황들도 인물 관계에 긴장을 새긴다. 그러나 이카루스 2호가 조난됐던 이카루스 1호와 만난 이후, 드라마는 급반전한다. 우주선 안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해 갑작스레 신과 인간의 관계를 들먹이며 무차별 살인을 저지르자 줄곧 긴장감을 유지해온 <선샤인>의 감정선은 이때부터 뒤죽박죽이 된다. 좀비 스릴러를 방불케하는 후반부의 ‘반전’ 덕택에 <선샤인>은 오히려 SF 스릴러 특유의 긴장감을 잃었다.
<선샤인>의 다국적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여러 나라의 배우들이 함께 했다. <28일 후…> 이후 다시 대니 보일과 만난 아일랜드 출신 배우 킬리언 머피는 물론, <링 The Ring> 시리즈의 일본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와 <와호장룡 Crouching Tiger, Hidden Dragon>의 양자경 등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이 손을 맞잡았다. 우주선 대원이 되기 위해 무중력 비행, 비행 시뮬레이션 등의 '몸으로 쌓는' 우주 지식을 체득해야 했던 배우들은 천문학과 물리학 강의라는 '머리로 쌓는' 우주 지식까지 겸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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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4월2주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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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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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이라곤 딱 열일곱 명인 작은 섬, 극락도. 적은 식구지만 보건소와 학교를 다 갖춘 마을다운 마을, 이웃 사이에 정이 가득한 인심 좋은 마을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마을 어른 김노인(김인문)의 칠순 잔칫날 밤까지의 얘기다. 밤 사이 벌어진 화투판에서 송전 기사 두 명이 주검이 돼 나타나자 마을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다. 물론 이게 끝이라면 그저 ‘사건’으로 남았을 테다. 문제는 다음부터. 강력한 용의자였던 덕수부터 한 사람씩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보건소장 제우성(박해일)을 필두로 초등학교 선생 장귀남(박솔미)과 마을 이장(최주봉)이 머리를 맞대어 보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 뿐이다. 극락도에서 열일곱 명의 자취가 모두 사라질 그날까지.
섬은 사면을 바다로 향한, 하늘을 머리에 둔 열린 공간이자 뭍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닫힌 공간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And Then There Were None]의 인디언 섬이 미스터리 범죄가 일어나는 ‘밀실’ 역할을 톡톡히 하듯, <극락도 살인사건>의 배경인 극락도 역시 잇단 살인사건에서 주인공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계속되는 죽음의 손길에서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사건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제 범인은 뒷짐지고 구경만 해도 된다. 고립된 공간, 한정된 인물들 사이에서 의심이 불을 당기면 곧 목숨을 건 아귀다툼이 그 안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연이은 살인사건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미스터리 추리극이란 기본 골격 위에 의심으로 커져간 마을 사람들의 아귀다툼을 그려 넣는다. 극락도에서 차례로 죽어간 사람 가운데 ‘명백한’ 살인에 의한 시체는 별로 없다. 의심이 낳은 싸움에 의한 총질과 칼질, 발길질이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치밀한 미스터리 구도보다 죽음의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의 뒤틀린 심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 <극락도 살인사건>은 그래서 미스터리 추리물의 매력에선 한 발 물러서 있다. 단서들을 조립해가며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 안에선 빈틈이 들쑥날쑥 드러나고, 마을에 전해지는 ‘열녀문’에 관한 소문이 소복 입은 귀신으로 직접 인용된 장면들은 ‘복선’으로 작용하기는커녕 이야기를 더욱 복잡하게만 한다. 더욱이 범인의 실체가 밝혀지는 마지막 반전은 충분히 놀랍지만, 내레이션으로 친절히 밝히고 덧붙여 설명하는 사건의 뒷모습은 <극락도 살인사건>을 김빠진 싱거운 미스터리로 머물게 한다.
미스터리의 묘미는 약하지만 닫힌 공간 안에서 삶과 죽음을 놓고 벌이는 아귀다툼이 생생하게 드러날 수 있었던 건 모두 배우들의 완숙한 연기력 덕분이다. <살인의 추억>의 의뭉스런 사내 이후 또 다시 비밀이 가득한 보건소장을 연기한 박해일은 물론이고 성지루, 박원상, 최주봉, 안내상, 박솔미 등 열일곱 섬마을 주민 모두 제 몫의 빼어난 감정 연기를 선보이며 영화에 대립과 긴장의 팽팽한 기운을 새겼다. <극락도 살인사건>은 김한민 감독이 80년대 후반, 고향 순천에서 흘려 들었다는 한 섬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졌다. <극락도 살인사건>으로 장편 연출 데뷔한 김한민 감독이 이야기도 직접 썼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할리우드랜드> - LA Confidential
1959년 6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인기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 Adventures of Superman>의 스타 배우 조지 리브스(벤 애플렉)가 할리우드의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된다. 인기 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의 약혼자 레오노어 레몬(로빈 튜니)와 미국 전역의 수백만 팬들에게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지만, LA 경찰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서둘러 종결짓는다. 그러나 조지 리브스의 어머니 헬렌 베솔로(로이스 스미스)는 아들의 죽음을 타살로 확신하고, 사립 탐정 루이스 시모(애드리안 브로디)를 고용하여 조지의 죽음을 조사하도록 한다.
조지 리브스. 1914년 미국 출생으로, 1951년부터 1958년까지 총 104편의 에피소드에 걸쳐 방영된 TV 시리즈 <슈퍼맨의 모험>으로 전후 영웅을 갈망하던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초대 슈퍼맨으로 유명한 배우다. 조지 리브스는 <슈퍼맨의 모험>으로 전 미국의 슈퍼 히어로로 떠오르는데는 성공했지만, 그에게 드려진 슈퍼맨 코스튬은 정극 배우로 향하는 발목을 사사껀껀 잡는다. 어렵게 오디션을 통과하여 출연한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지상에서 영원으로 From Here to Eternity> 시사회에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총알보다 빠른 사나이'라며 킥킥대고, 결국 그의 출연 분량은 모두 잘려 나가기에 이른다.
<섹스 앤 더 시티 Sex and the City> <식스 피트 언더 Six Feet Under> <소프라노스 The Sopranos> 등 일련의 HBO TV 시리즈로 유명한 앨런 쿨터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 <할리우드랜드 Hollywoodland>는 조지 리브스의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조지 리브스의 죽음을 조사하던 루이스 시모는 조지와 관련된 할리우드 쇼 비지니스의 추악한 현실에 직면한다. 애초 조지 리브스에 대해 관심조차 없던 루이스는 점차 그에게 일종의 동질감까지 느끼게 된다. 이처럼 <할리우드랜드>는 루이스의 시점과 조지의 시점을 오가며, 추악한 진실에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범죄 스릴러와 코미디 장르가 절묘하게 섞인 <소프라노스>처럼 <할리우드랜드>에서도 앨런 쿨터의 장기는 여전히 발휘된다.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있는 조지 리브스의 죽음에 대해 섯부른 결론을 내리지는 않지만, <할리우드랜드>는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묘한 긴장감을 극에 부여한다. 애드리안 브로디, 벤 애플렉, 다이안 레인, 밥 호스킨스 등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중견 배우들의 호연은 영화에 확실하게 힘을 실어준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고스트 라이더> - 영화로 부활한 안티히어로, 악마와 맞서다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자니 블레이즈(니콜라스 케이지). 모터사이클 스턴트맨인 그는 암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피터 폰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는 자니 블레이즈의 곁을 끝없이 맴돌기 시작하고, 자니 블레이즈는 그 계약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임을 깨닫는다. 한편, 메피스토펠레스의 아들인 블랙하트(웨스 벤틀리)가 세 명의 타락천사를 데리고 세상에 나타난다. 그들의 목적은 메피스토펠레스를 죽이고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 메피스토펠리스는 자니 블레이즈에게 블랙하트 일당을 제거할 경우 영혼을 돌려주겠다고 속삭인다. 이제 자니 브레이즈는 밤마다 불멸의 영혼사냥꾼인 ‘고스트 라이더’로 변신해 타락천사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마블 코믹스의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고스트 라이더 Ghost Rider>는 악의 무리에 맞선 안티히어로 자니 블레이즈의 이야기다. 자니 블레이즈라는 캐릭터는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는 점에서 괴테의 [파우스트 Faust]를 연상시키며, 선과 악의 두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와 닮아있다. 하지만 <배트맨 Batman>이나 <스파이더 맨 Spider-Man>에서 보여주었던 고뇌하는 안티히어로의 모습은 <고스트 라이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고스트 라이더>는 자신의 영혼을 되찾기 위해 악의 무리에 맞서는 자니 블레이즈의 여정 만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기권을 뚫고 비행기를 막아내는 <수퍼맨 리턴즈 Superman Returns>나 흑백화면 안에 다채로운 캐릭터의 향연을 담아냈던 <씬 시티 Sin City>에 비해 <고스트 라이더>는 시각적 쾌감이 강한 영화가 아니다. 여섯 개의 블랙호크 헬기 위를 뛰어넘는 자니 블레이즈의 스턴트 쇼엔 박진감이 떨어지며 고스트 라이더의 얼굴은 표정 없이 화염으로 이글거릴 뿐이다.
하지만 <고스트 라이더>는 영화 면면에 녹아난 상징을 읽을 때 쏠쏠한 재미가 있다. 고스트 라이더라는 캐릭터는 미국문화를 상징하는 카우보이와 똑 같다. 올가미는 쇠사슬로, 말은 모터사이클로 바뀌었을 뿐 가죽 자켓을 입고 악당을 처치하기 위해 내달리는 모습은 카우보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걸작 <이지 라이더 Easy Rider>(1969)에 출연한 피터 폰다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맡은 것도 괜한 설정이 아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기 전 즐거웠던 유년기 시절로 돌아가길 원하는 자니 블레이즈는 사탕과 젤리를 입에 물고 산다. 속죄와 구원, 천사와 악마 등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고스트 라이더>에 카펜터즈(목수)의 음악이 쓰이는 것은 하나의 농담처럼 보인다. <데어데블 Daredevil>의 마크 스티브 존슨이 <고스트 라이더>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천년학> - 한 많은 이복 남매의 사랑 이야기
이복 남매 동호(조재현)와 송화(오정해)는 소리꾼 양아버지 유봉(임진택)을 따라 전국을 떠돌며 살아간다. 소리를 하는 송화와 북 장단을 맞춰주는 동호는 24시간 붙어있다 보니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혈기왕성한 동호는 아버지 유봉의 횡포와 이복 누나 송화에 대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채 집을 나가버린다. 군대를 다녀오고 유랑극단의 멤버가 되어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동호는 유랑극단의 여배우 단심(오승은)의 유혹에 빠져 동거를 하지만, 언젠가 송화를 만날 날만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양아버지는 죽고 송화는 눈이 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호는 송화를 찾아나선다.
영화는 중년의 동호가 어린 시절 양아버지와 누나 송화와 함께 가끔 머물렀던 선학동 주막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학동 주막은 송화에 대한 짝사랑으로 평생 주막을 지키며 살아가는 용택(류승룡)이 지키고 있다. 선학동 주막에서 재회한 두 남자는 서로 사랑했던 한 여자 송화에 대한 기억을 풀어놓으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눈다. 영화는 그렇게 현재와 과거를 들락날락하며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야했던 한 이복 남매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장대하게 펼쳐놓는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은 평생 그리워하면서도 함께 살지 못하는 이복 남매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이자 평생 이름 한번 빛내보지 못한 무명 소리꾼들의 이야기다. 송화와 동호는 성공하지 못한 소리꾼 아버지에 의해 소리꾼으로 키워지지만 이들 역시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이름을 얻지 못한 채 평생을 떠돌다 스러져간다. 송화는 잔칫집과 술집을 전전하며 소리로 연명하는 처지지만 목소리를 갈고 닦는 일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복 누나 송화의 소리에 북 장단을 맞춰주겠다는 일념으로 연습에 매진하는 동호 역시 고작 유랑극단 무대거나 기생들의 술자리에서 실력발휘를 할 뿐이다.
임권택 감독은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와 성공하지 못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관조적인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100번째 영화라는 강박은 찾아보기 힘들다. 제작 중단과 주연 배우의 교체 등 진통을 겪은 흔적도 드러나지 않는다. 99편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노감독의 여유는 롱샷으로 잡아낸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과 인물을 자연의 일부로 품어내는 화면에서 묻어난다. 양방언의 애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풍경이 펼쳐지는 선학동의 해질녘을 담은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백미. <서편제>에서 송화로 출연했던 오정해가 14년 만에 다시 송화로 출연해 농익은 소리를 들려주며 <서편제>의 맥을 이었고, 개성 강한 연기를 주로 선보였던 조재현이 가슴에 한을 품은 떠돌이 고수 동호 역을 맡아 오정해와 호흡을 맞췄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4/12 개봉작 리뷰]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 사랑스런 대작 신파 코미디
못된 남자들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여자의 이야기는 그리 낯선 소재가 아니다. 한국 영화사에서도 이두용 감독의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 같은 영화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단순히 소재만 본다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Memories of Matsuko>(이하 ‘마츠코’)은 일본판 ‘영자의 전성시대’라 할 수 있다. 마츠코(松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송자의 여인잔혹사’라 해도 무방하다. <마츠코>의 시작은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과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도쿄에서 백수 생활을 하던 쇼(에이타)는 아버지(카가와 테루유키)로부터 오랫동안 행방불명이었던 고모 마츠코(나카타니 미키)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말을 듣는다. 명함 한 장을 손에 꽉 쥔 채 강변의 잔디밭에서 53년의 삶을 마감한 마츠코는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 ‘혐오스런 마츠코’라 불리며 생을 마감한 고모의 과거를 좇는 쇼와 파란만장한 마츠코의 일생이 교차되며 하나둘씩 비밀의 열쇠가 풀리기 시작한다. 그 시점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츠코의 인생을 급변하게 만든 첫 번째 계기는 학생의 절도사건을 무마하려다 절도범으로 몰리면서 교직을 떠나야 했던 일이다.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동경하는 무명의 작가 지망생 야메가와(쿠도 칸쿠로)와 동거를 시작한 마츠코는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버텨 나간다. 야메가와는 자살로 삶을 마감하고 야메가와를 시기하던 친구 오카노와 불륜관계를 맺으나 아내에게 들킨 후 버림받기에 이른다. 매춘부가 된 마츠코는 업소의 최고 인기녀로 급부상하지만 동거하던 기둥서방 오노데라(다케다 신지)에게 배신당한 후 분노에 휩싸여 살인을 저지른다. 수사망을 피해 도쿄로 피신한 마츠코의 새로운 연인은 이발사 시미즈.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동거 중 체포돼 교도소로 수감된 마츠코는 8년의 형기를 채우고 출소한 후 시미지를 다시 찾아가지만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는 그를 멀리서 보고 낙담한 채 길을 떠난다. 마츠코 앞에 우연히 나타난 제자 류(이세야 유스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고백하며 외로운 마츠코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츠코>는 비극이자 희극이 공존하는 묘한 작품이다. 로맨스와 뮤지컬이 판타지와 결합해 마치 CF 같기도 하고 뮤직비디오 같은 화려한 영상을 펼쳐 보인다. 감독 나카시마 테츠야는 오랜 CF 경력 끝에 <불량공주 모모코 Kamikaze Girls>로 데뷔해 일본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인물이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삶을 무겁게 그린 원작 소설을 판타지 같은 뮤지컬 로맨스로 변형시킨 나카시마 테츠야는 <불량공주 모모코>에서 보여주었던 화려하고 자극적인 색감과 미술, 세트, 현란한 편집 기법 등을 한 여자의 일대기와 접목시켜 한 편의 장대한 콜라주를 완성해 낸다. 특히 꽃으로 수놓은 화려한 색감의 판타지적 미장센과 뮤직비디오 같은 뮤지컬 장면은 <마츠코>의 가장 뚜렷한 외적 특징이다. <마츠코>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서 가치가 높은 것은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을 동시에 견지하며 눈물샘과 웃음보를 동시에 자극한다는 점 때문이다. 감독의 꼼꼼하고 집요한 연출력도 대단하지만 키네마준보 베스트10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나카타니 미키의 열연은 작품의 완성도를 배가시킨다. 일본 문화 애호가라면 나카타니 미키, 이세야 유스케, 다케다 신지 등 주요 출연진의 면면은 물론 시바사키 코우, 츠치야 안나, 작가 쿠도 칸쿠로, 가수 보니 핑크 등의 특별 출연도 반가울 듯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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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4월1주차 개봉영화
2007년 04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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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에서 아침을 Breakfast on Pluto>은 아일랜드 영화다. 아일랜드 출신 작가와 감독, 배우가 손을 잡고 만든 작품답게 <플루토에서 아침을>에는 아일랜드의 풍경과 아일랜드 특유의 문화가 오롯이 녹아 있다. 아일랜드가 낳은 유명 감독 닐 조단은 아일랜드 출신 시나리오 작가 겸 소설가인 패트릭 멕카베와 <푸줏간 소년 The Butcher Boy>(1997) 이후 두번째로 호흡을 맞췄고, 주인공 키튼 역에 킬리언 머피를 비롯, 연기력을 인정받는 아일랜드의 배우들이 가세했다.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태어나자마자 성당 앞에 버려진 패트릭(킬리언 머피)은 엄격한 양어머니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성장한다. 자라면서 자신을 여자라고 생각하게 된 패트릭은 자신의 이름을 성정체성이 불분명했던 성녀의 이름인 키튼으로 바꾸고 여장을 하고 다닌다. 자신을 버리고 간 친엄마를 '유령 숙녀'라고 부르며 그리워하던 키튼은 어느날 친엄마가 런던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런던으로 향한다. 아일랜드 시골뜨기 키튼에게 런던은 정글이었다. 카바레 가수, 놀이공원의 광대, 마술사 보조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여러 남자들과 사랑하고 이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친엄마를 찾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친아버지인 시골 마을의 신부가 찾아와 키튼의 친엄마가 사실은 아일랜드 시골 마을에서 가정을 꾸린 채 살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1992년 작 <크라잉 게임 The Crying Game>에서 성정체성이 모호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도발적인 정치 문제를 풀어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닐 조단 감독이 오랜 만에 다시 여장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플루토에서 아침을>을 만들었다. <크라잉 게임> <마이클 콜린스 Michael Collins> 등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관심을 기울여 온 닐 조단 감독은 <플루토에서 아침을>에서 다시 한번 아일랜드의 과거 한 시점을 스크린에 되살려낸다. 우리가 흔히 '변태'라고 부르는 복장도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플루토에서 아침을>에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0~1970년대 아일랜드의 정치적 상황과 문화적 배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닐 조단 감독은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테러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아일랜드의 불안한 정치 상황과 언제든지 테러 용의자로 몰릴 수 있는 사회 분위기, 여장 남자, 피부색 등에 대한 사회, 문화적 편견 등에 대한 이야기를 심각하게 묘사하지 않는 대신,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야'를 외치는 키튼 캐릭터를 내세워 경쾌한 톤으로 풀어낸다. 닐 조단 감독은 이처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삶을 긍정하는 키튼의 모습을 통해 긍정이야말로 인생의 난관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이라고 역설한다.
<28일 후... 28 Days>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선샤인 Sunshine> 등에서 열연한 킬리언 머피가 바보스러울 만치 긍정적인 인물 키튼을 마치 자기 옷을 입은 것처럼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쉰들러 리스트 Shindler's List>로 유명해진 아일랜드 배우 리암 니슨이 키튼의 친아버지인 인자하고 따뜻한 버나드 신부로 분한다. 이외에도 스티븐 레이, 브렌단 글리슨, 루스 네가, 로렌스 킨런 등 아일랜드 출신의 연기력 뛰어난 배우들이 조연으로 참여해 완벽한 앙상블을 선보이며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4/5개봉작 리뷰] <우아한 세계> - 우아하지 않은 가장의 우아한 꿈
강인구(송강호)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있다. 아내(박지영)와 두 명의 자녀가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캐나다로 유학 간 아들의 학비를 걱정하고, 갑자기 성적이 뚝 떨어진 딸(김소은)의 학교 생활을 신경 써야 하며, 가족의 안락한 삶을 위해 좋은 집으로 이사 갈 궁리를 해야 하는 대한민국 평균 가장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다. 낮에는 정글 같은 직장 내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밤이 되면 녹초가 되어 돌아온다. 대단한 성공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가족을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일반적인 가장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직업이 특별하다는 것이다. 그는 조직폭력배다. 아내와 딸이 혐오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당장 가족을 먹여 살리고 새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강인구는 어쩔 수 없이 조직에 몸담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 한 건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조직을 떠나려 하지만 조직 내의 라이벌(윤제문)은 그의 밥그릇마저 빼앗으려 한다. 칼에 찔리고 경찰서를 드나드는 남편이 지긋지긋해진 아내는 이혼을 요구하고 딸과 함께 친정으로 떠나버린다. 위기에 몰린 가장 강인구는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아한 세계>의 강인구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적자생존의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과 정신을 혹사시켜야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여러모로 부족한 남편이고 아버지일 뿐이다. 가족과 함께 우아한 삶을 살고 싶어도 팍팍한 현실은 그의 목을 졸라온다. 조직폭력배라는 직업은 단지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극단적인 은유일 뿐이다. 상징과 은유를 덜어 내면 강인구는 대한민국의 모든 가장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여타 조폭 영화들과 분명하게 대립되는 부분이다. <우아한 세계>를 조폭 영화의 진화 혹은 돌연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조직폭력배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가 아니라 묘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연애의 목적>으로 데뷔한 한재림 감독은 강인구라는 인물을 통해 갱스터의 세계나 한국 중산층 가족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대신 그 속에 위치한 보편적인 의미의 한국 사회 가장을 응시한다. 지극히 1인층 시점을 유지하며 직장과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인물의 현실을 낱낱이 드러낸다. <우아한 세계>가 누아르인 것은 ‘OO파’, ‘OO파’ 같은 폭력조직들이 등장해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자체의 생존논리가 거대한 갱스터 조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상황과 경쾌한 음악을 대조적으로 배치시키는 연출 방식에서 드러나듯 한재림 감독은 관객의 과도한 감정이입을 배제하기 위해 관습적인 장치 사용을 애써 피한다. 아이러니와 위트, 비극성을 공존시키며 따뜻한 인간 드라마를 완성해낸다. 휴먼 드라마는 결코 아니지만 누아르라는 장르적 특성에 비해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 따뜻하다. <우아한 세계>의 장점은 적당한 거리두기에 있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피하지만 연민의 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된다. 커다란 집에 홀로 남은 강인구가 가족의 모습이 담긴 테이프를 보며 눈물 흘리다 그릇을 집어 던지는 장면은 주인공을 바라보는 연출자의 시선이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최근 몇 년간 제작된 한국영화의 엔딩 장면 중 가장 인상적인 명장면이라 불릴 만한 이 신은 영화 속 주인공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압축해 담아내며 작품의 궁극적 메시지를 함축해 묘사한다. 단 하나의 장면으로 연기상을 수여한다면 송강호의 엔딩 신 명연을 0순위 후보로 올려야 할 것이다. 후반부로 접어들며 집중력을 잃는 작품의 단점을 한재림의 연출력과 송강호의 연기력이 완벽하게 결합된 엔딩 장면으로 만회한다. 한국 조폭 영화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우아한 세계>는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작품들 중 하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4/5 개봉작 리뷰] <마하 2.6: 풀 스피드> - 실사촬영으로 담아낸 극한의 속도감
차세대 전투기 미라지 2000이 에어쇼 도중 사라져 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스 최고의 공군 마르첼리(브누아 마지멜)와 발로아(클로비스 코르니악)는 미라지 2000을 찾으라는 명령을 하달받고 수색작전에 돌입한다. 레이더 망을 피해 교묘하게 위장 비행하고 있던 미라지2000은 이들에게 발각되자 위협적인 태세를 취하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 발로아를 구하기 위해 마르첼리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미라지 2000을 격추시킨다. 부대로 복귀한 두 비행사는 상부의 명령에 불복한 죄로 공군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이들의 실력을 눈여겨 본 전투기 판매상은 실의에 빠진 이들에게 전투기를 다시 몰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마하 2.6: 풀 스피드 Les Chevaliers du ciel>는 최신예 전투기가 선사하는 극한의 속도감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카레이서 출신이자 <택시 Taxi>의 연출을 맡았던 제라르 피레 감독은 <마하 2.6: 풀 스피드>에서 무대를 하늘로 옮기며 긴박감 넘치는 비행 대결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다. 역동적인 비행 신을 연출하기 위해 피레 감독은 실제 비행기에 특수 카메라를 달아 전투기를 뒤쫓으며 영화를 촬영했다.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되지 않은 <마하 2.6: 풀 스피드>의 비행 장면은 전투기의 미세한 떨림까지 고스란히 잡아내 사실감을 높이고, 구름을 뚫고 360도 회전하는 미라지 2000의 모습은 짜릿한 전율을 선사한다. 알프스 산맥에서 파리 시내까지 펼쳐지는 유려한 풍경 역시 <마하 2.6: 풀 스피드>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속도감 있는 영상에만 집중한 탓에 허술한 이야기 구조는 <마하 2.6: 풀 스피드>의 단점으로 작용한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테러리스트 파일럿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으며, 차세대 전투기 미라지 2000을 둘러싼 음모 역시 설명 없이 성급하게 마무리된다. 또한 중동 테러집단의 방해만 없었다면 미국과의 비행 시합에서 무난하게 우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정은 프랑스 전투기 미라지 2000에 대한 자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한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4/5 개봉작 리뷰]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 - 극성 엄마, 딸의 연애코치가 되다
밀리(맨디 무어)는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 하지만 결혼은커녕 지금껏 제대로 된 연애도 한번 못해봤다. 어떻게 된 게 만나는 남자마다 게이 아니면 유부남, 그도 아니면 변태들이다. 하지만 밀리의 이 ‘저주 받은’ 연애사를 본인보다 더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녀는 다름아닌 밀리의 엄마 대프니 와일더(다이앤 키튼). 딸 셋을 혼자 힘으로 키워낸 억척엄마 대프니는 결혼해 잘 사는 두 딸과 달리 연애 젬병인 밀리가 걱정이 돼 밤잠을 설칠 지경이다. 자고로 엄마들의 치맛바람은 동서양 구분이 없는 법. 결국 대프니는 스스로 밀리의 애인을 찾기로 결심한다. 인터넷 사이트에 ‘애인구함’ 광고를 내고, 직접 면접을 거쳐 대프니가 낙점한 ‘미래 사위’는 건축가 제이슨(톰 에버렛 스콧). 이렇게 속 사정 전혀 모르는 밀리는 자신에게 다가온 남자 제이슨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밀리에게 또 다른 매력남 조니(가브리엘 매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밀리의 ‘양다리 연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제 ‘Because I Said So(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서 알 수 있듯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는 딸의 연애를 ‘내 맘대로’ 주무르고 결정하고 싶어하는 극성 엄마의 일기를 담고 있다.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마음으로 딸의 감정까지 조정하려 드는 엄마 대프니와 딸 밀리의 좌충우돌이 코믹한 톤으로 펼쳐진다. 문제는 티격태격 코믹한 전반부의 영화 흐름이 모녀간의 이해와 화해, 모녀애로 발전하는 후반까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코믹한 상황 속에서 감동을 끌어내려는 ‘전형적인’ 드라마 공식이 투박하게 표현돼 결국 유쾌한 코미디도, 진한 모성애도 모두 빛 바랜 꼴이 되고 말았다.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부분은 현실 속 여자들이 한번쯤 고민해봤을 ‘조건 좋은 남자와 조건보다 마음이 끌리는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는 밀리의 양다리 연애다. 직업, 돈, 명예, 외모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제이슨과 마음 맞는 건 많지만 여러 가지 ‘세부 조건’이 형편없는 조니 사이에서 갈등하는 밀리의 고민이 영화에 현실적인 색을 입힌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영화가 새롭고 획기적인, ‘아찔한’ 결론을 찾았다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진심’이란 ‘전형’에서 역시 영화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The Truth about Cats & Dogs>을 통해 연애의 세심한 심리를 꿰뚫었던 마이클 레만 감독이 잡아낸 여성들의 연애 심리는 여전하지만 이것이 전형적인 이야기 틀 안에서 신선한 자극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영화에 기운을 불어넣는 건 억척 엄마 대프니를 연기한 다이앤 키튼. 다이앤 키튼은 ‘참견’이 짜증이 아닌 애교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며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엄마를 훌륭히 표현해낸다. 그녀와 호흡을 맞춰 밀리를 연기한 맨디 무어도 영화에 귀엽고 발랄한 미소를 더했다. 드라마 <섹스 앤 시티 Sex and the City>의 사라 제시카 파커의 의상을 담당한 샤이 컨리프가 만들어낸 패션 스타일들은 여성 관객들을 <철없는 그녀의 아찔한 연애코치> 앞에 불러들이게 할 또 다른 요소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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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3월 마지막주, 개봉영화
2007년 03월 2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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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3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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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산골마을 시골 총각 조춘삼(차승원)은 얼마 전 마을 이장이 됐다. ‘젊은 피’를 부르짖는 마을 어르신의 뜻에 따라 이장 자리에 오른 며칠 후, 군수 선거에서 또 다른 ‘젊은 피’가 선거 유세를 벌인다. 학창 시절, 반장 자리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춘삼의 빛에 가려 만년 부반장에 머문 노대규(유해진)가 그 주인공. 얼마 후 둘은 최연소 마을 이장과 최연소 군수로 다시 만난다. 여러모로 자존심이 밟힌 춘삼, 신임 군수 대규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딴죽을 걸기 시작한다. 하지만 춘삼과 대규의 ‘귀여운’ 티격태격은 곧 젊은 군수를 누르려는 군의 유지 백사장(변희봉)의 음모가 끼어들면서 큰 싸움으로 변화해 간다.
<이장과 군수>는 <재밌는 영화>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까지, 코미디 영화만을 고집스레 찍어온 장규성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오랜 세월 ‘웃음’을 연구해온 감독답게 <이장과 군수>에도 웃음이 넉넉하다. 곧 마흔을 바라보는 ‘다 큰’ 어른 춘삼과 대규의 바닥을 바라보는 자존심 싸움은 유치하지만 충분히 재미있고, 자잘하게 흩뿌려진 코믹 에피소드들도 웃음을 만들어낸다. 거기에 장규성 감독의 전작 <재밌는 영화>를 패러디 한 장면들을 배치해 재치를 더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초반엔 웃음, 후반엔 감동’이란 공식을 착하게 따르는 <이장과 군수>는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으로 웃기다가 중반을 넘어서며 급작스레 ‘우정’의 이름으로 이 둘의 싸움에 마침표를 찍는다. 영화 중반, 춘삼과 대규의 싸움이 가장 큰 폭으로 대립하고 폭발하는 사건으로 끌고 온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 유치’를 둘러싼 아웅다웅도 영화의 가벼운 웃음 톤을 흐트러트린다. 지역 발전을 위해서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유치해야 한다는 군수 대규와 백사장의 사주를 받아 ‘별 뜻 없이’ 이에 반대 투쟁을 벌이는 춘삼의 대립은 얼핏 참여정부를 빗대어 풍자한 듯 보이지만 어설픈 수준에 머물고 곁가지로 끌고 들어온 공무원 비리 문제도 코미디 영화의 호흡을 무디게 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잦은 회상 장면도 영화의 흐름을 방해한다.
<이장과 군수>를 가장 빛나게 하는 건 ‘이장’과 ‘군수’다. 이젠 어떤 코믹연기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 차승원의 농익은 코믹 연기, 온 몸 던진 슬랩스틱이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과장된 행동으로 웃음을 만들어내는 ‘이장’ 차승원과 달리 차분한 톤의 드라마를 끌고 가는 ‘군수’ 유해진의 감정 연기는 <이장과 군수>의 가장 큰 매력으로 뽑을 수 있을 만큼 ‘백미’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뷰티풀 선데이> - 삐뚤어진 사랑에 용서를 구합니다
강력반 소속 강형사(박용우)가 타락한다. 식물인간이 된 아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조직과 손을 잡고 검은 돈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강형사는 아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경찰청 내사과는 강형사의 비리를 눈치채고, 병상에 있는 아내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내성적인 성격의 고시생 민우(남궁민)는 우연히 만난 수연(민지혜)에 반해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저 멀리서 연모의 감정을 품고 있던 민우는 술에 취한 어느 날 우발적으로 수연을 겁탈한다. 몇 년 후 수연과 다시 만난 민우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그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민우와 수연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수연은 민우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뷰티풀 선데이>는 아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강형사의 이야기와 삐뚤어진 욕망을 숨긴채 살아가는 민우의 이야기가 교차되면서 진행된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사랑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공통점을 찾을 수 없다. 두 이야기는 서로 마주치지도 영향을 주지도 않은채 나란히 진행되다가, 두 사람이 한 장소에 만나면서 이들을 둘러싼 비밀이 한꺼번에 공개된다. 그러나 허술하게 연결된 이야기 구조와 느닷없이 등장하는 플래쉬 백 장면 탓에 반전의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다.
<뷰티풀 선데이>의 또 하나의 문제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극도로 절제된 대사는 비열한 캐릭터인 민우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에 적절치 않고, 강형사를 괴롭히는 조직폭력배들은 전형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그려져 흡인력을 크게 떨어뜨린다. <뷰티풀 선데이>는 성폭행, 죄의식, 속죄라는 무거운 소재를 통해 원죄와 구원을 표현하려 했던 감독의 야심이 엿보이는 영화지만, 매끄럽지 않은 연출과 자연스럽지 못한 캐릭터 설정으로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박용우의 눈부신 호연에도 불구하고 웃음과 인간미를 잃고 서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우리학교> - 남북의 구분이 없는 학교
일본 내에는 현재 80여 개의 조선학교가 있다고 한다. 명칭이 조선학교인 것은 해방 직후 조국으로 건너가지 못한 조선인 1세들이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사비를 들여 만든 학교이기 때문이다. 해방 후 재일동포들은 식민지 이전의 ‘조선’으로 국적이 변경됐고, 많은 동포들이 한국 국적을 새로 취득한 반면 일부 동포들은 조선 국적을 고집한 채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조선학교가 일본 내에서 정식 학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해방 후 한때는 540여 개에 달하던 조선학교는 일본 극우파 세력의 탄압 속에서 70퍼센트 가까이 자취를 감춰야 했다. 흔히 조선학교는 조총련계의 ‘북조선학교’로 인식되고 있다. 일본인 특유의 한국어 억양과 북한식 한국어가 뒤섞인 말투도 그렇고 북한 관점의 역사 교육 등 여러모로 북한 친화적인 인상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해방 후 북한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 충돌하며 이데올로기 문제로 비약된 탓이다. 조선학교는 엄밀히 말해 북조선학교라기보다는 민족학교라고 지칭하는 게 옳다.
조선학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다큐멘터리 <우리학교>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다큐멘터리 <우리학교>는 일본 홋카이도에 위치한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의 1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감독은 3년 5개월 동안 혹가이도 조선학교에 머물며 교원, 학생들과 함께 지낸 일상을 1년의 촬영 분량에 담아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학교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소개되지만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이 영화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는 학생들이 한국어로 수업을 받고 대화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낯선 풍경 속에 펼쳐진다. 일본 우익세력의 위협 속에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꿋꿋이 학창 생활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이들을 가르치는 교원들에게 감독은 보이지 않는 박수를 보낸다. 특히 감독이 동행할 수 없었던 북한 방문을 학생들이 직접 찍은 장면에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민족의식이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인상적인 것은 조선학교의 독특한 교육 방식이다. 교사와 학생이 친구처럼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 자율적으로 학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모습,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조선학교 사람들의 모습에서 바람직한 교육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된다. 혹가이도조선학교 고교 3학년 학생들이 졸업식 때 흘리는 눈물 속에 아마도 그 답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블랙북> - 점잖고 진지해진 폴 버호벤의 귀향작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네덜란드. 전쟁 전 독일 베를린에서 가수로 활동했던 유태인 라헬(카리스 판 하우텐)은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독일군 치하에 있는 네덜란드 또한 안전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국경을 넘도록 도와주겠다는 한 남자의 말을 믿고 돈을 준비해 간 라헬은 한동안 떨어져 있던 가족과 재회하지만 배를 타고 가던 중 독일군에게 발각돼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홀로 살아남은 라헬은 레지스탕스의 일원이 되어 스파이 임무를 맡는다. 첫 번째 임무는 독일군 장교 문츠(세바스찬 코흐)를 유혹해 독일군 본부에 타이피스트로 취직하는 것이다.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던 라헬은 조금씩 문츠를 사랑하게 되고, 라헬의 정체를 눈치 챈 문츠 또한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장교들의 파티가 있던 밤, 레지스탕스의 핵심 대원들은 라헬이 빼낸 정보를 활용해 구출 작전을 시도하지만 누군가의 배신으로 인해 한스(톰 호프만)와 일부 대원을 제외한 전원이 몰살당하는 참사를 당한다. 반역자로 몰린 문츠와 함께 투옥된 라헬은 항변한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처형될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폴 버호벤 감독이 <포스맨 De Vierde Man> 이후 23년 만에 네덜란드어로 연출한 <블랙북 Zwartboek>은 무려 20여 년에 걸쳐 구상된 작품이다. 아이디어 단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블랙북>은 40년 동안 묵혀 있던 작품이라 말할 수도 있다. 감독이 2차 세계대전에 휘말린 네덜란드 대학생들의 생존기를 그린 1977년작 <서바이벌 런 Soldaat van Oranje>을 준비할 당시부터 기획한 <블랙북>은 비슷한 소재의 영화를 연달아 만들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미뤄져 오랫동안 서랍 속에 묵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리우드로 진출한 폴 버호벤은 살아남기 위해 상업적인 영화들을 계속 연출해야 했고, <할로우 맨 Hollw Man>을 찍고 난 2000년 후반에야 ‘내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오래 전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1,700만 유로를 쏟아 부으며 역대 네덜란드 영화 중 가장 많은 제작비로 만들어진 <블랙북>은 촬영 도중 제작이 중단되는 사태를 겪는 등 영화 내용만큼 파란만장한 과정을 겪은 후에야 완성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블랙북 Zwartboek>은 평범한 유태인 여자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실제 사건들을 토대로 구성된 스토리이지만, 세부 내용들은 모두 허구다. 주인공인 라헬 역시 허구의 인물이다. <블랙북>이 여타 전쟁영화들과 다른 점은 역사와 운명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투쟁한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점이다. 주인공 라헬은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돌파한다. 레지스탕스로 독일군과 싸우기도 하고 조국을 배신한 반역자로 몰리기도 하지만 결국 살아 자신만의 운명을 개척한다. 독일군과 레지스탕스의 대립이 영화의 주요 플롯이기는 하지만 <블랙북>의 인물들은 선악의 대립 대신 역사와 운명의 잔인한 굴레에 의해 움직인다. <블랙북>에는 여러 요소들이 톱니바퀴처럼 물려 움직인다. 대체로 어드벤처의 성격을 띠지만 멜로드라마의 요소도 있고 전쟁의 비극성을 고발하는 무거운 메시지도 담겨 있다. 물론 전쟁영화에 필수적인 액션 장면도 있고 스릴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극적인 반전도 있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감독의 연출력은 최근 그가 만든 할리우드 영화를 잊게 할 정도로 뛰어나다. 극적인 재미와 진지한 메시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룬 <블랙북>은 근래 폴 버호벤이 만든 영화 중 가장 점잖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만하다. 혼돈의 역사를 뚫고 살아 남은 강한 의지의 여성을 부족함 없이 소화해낸 카리스 판 하우텐의 연기도 영화의 완성도에 일조했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블루프린트> - 인간 복제 시대에 탄생한 모녀의 사랑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이리스(프란카 포텐테)는 자신이 불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진다. 피아니스트로서 빛나는 자신의 삶이 덧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리스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만은 살리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에 이른다. 결국 그녀는 유전 공학의 선두주자인 피셔(울리히 톰센) 박사를 찾아가 자신의 복제 인간을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한다. 인류 최초의 복제 인간 시리(프란카 포텐테)는 그렇게 탄생된다. 시리는 출생의 비밀을 모른 채 이리스에게 완벽한 피아니스트로 키워진다. 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성과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피셔 박사는 이리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시리가 복제 인간임을 공개한다.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행복했던 시리와 이리스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글루미 썬데이 Gloomy Sunday - Ein Lied von Liebe und Tod>로 유명한 롤프 슈벨의 두 번째 장편영화 <블루프린트 Blueprint>는 독일 작가 샤를로테 케르너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가까운 미래에 인간 복제가 실현된다는 가정하에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인간 복제를 다룬 여느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간다.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블루프린트>는 프란카 포텐테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녀의 탁월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롤라 런 Run, Lola, Run>과 <본 아이덴티티 The Bourne Identity> 등에 출연했던 프란카 포텐테는 자신과 음악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어머니와 음악에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자신이 어머니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는 딸,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한다. 프란카 포텐테가 <블루프린트>의 일등공신이라면 음악은 영화의 또다른 주인공. 피아니스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답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은 어머니와 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관객들의 감정선을 건드린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29 개봉작 리뷰] <말라노체> - My Own Private Oregon
미국 포틀랜드 변두리의 작은 편의점에서 일하는 청년 월트(팀 스트리터)는 어느 날 조니(더그 쿠예트)라는 멕시코인 불법체류자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러나 조니는 영어 한 마디도 못하는데다가 월트에겐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월트는 조니와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만, 조니는 그에게 짖굳은 장난으로 일관한다. 결국 월트는 조니와의 뜨거운 하룻밤을 위해 조니의 친구인 로베르토(레이 몬지)에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말라노체 Mala Noche>는 <굿 윌 헌팅 Good Will Hunting> <엘리펀트 Elephant>의 거스 반 산트 감독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이다. 1987년 로스앤젤레스 비평가협회 독립영화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말라노체>는 미국에서 극장 상영도 되지 않았고, 비디오나 DVD로 출시되지 않아, 지금까지 오직 그 이름만이 영화팬들에게 알려졌을 뿐이다.(이전까지 거스 반 산트의 공식적인 장편 데뷔작은 맷 딜런, 켈리 린치 주연의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The Drugstore Cowboy>였다) <말라노체>는 작년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서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35mm 필름으로 특별 상영 형식으로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미국 포틀랜드에서 주로 활동하는 시인 월트 커티스의 동명 소설 원작의 <말라노체>는 다름 아닌, 거스 반 산트의 1991년작 <아이다호 My Own Private Idaho>의 원형이 된 작품. '나쁜 밤'이라는 뜻의 영화 제목은 월트가 조니와 함께 보내는 하룻밤을 의미한다. 거친 흑백 화면 속에서 미국 서북부 황량한 포틀랜드 거리를 누비는 월트와 조니는 <아이다호>의 두 커플, 마이크(리버 피닉스)와 스콧(키애누 리브스)을 떠올리게 한다. <말라노체>가 대사와 드라마가 아닌, 침묵이 지배하는 몽환적인 영상에 올인하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주류에 속하는 뉴라인시네마에서 제작된 <아이다호>와는 달리 저예산영화 <말라노체>가 당시로는 꽤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며 강도가 다소 센 퀴어시네마라는 점 정도가 <아이다호>와는 다른 점이다.
1만 달러가 넘지 않는 저예산의 제작비에, 경험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 배우들을 고용하여 제작된 탓에 <말라노체>의 외형적인 만듦새는 웰 메이드 영화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흑백과 컬러가 교차되는 화면들은 지나치게 거칠고,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간간히 어설프며, 사운드는 끽끽대기까지 한다. 하지만 거스 반 산트가 지난 2000년 <파인딩 포레스터 Finding Forrester>를 끝으로 주류의 드라마투르기 영화가 아닌, <제리 Gerry> <엘리펀트> <라스트 데이즈 Last Days>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에서 파격적인 실험으로 나아간 것을 기억할 것. <말라노체>는 2000년 이후 거스 반 산트 영화의 정신을 담은, 그의 놀라운 데뷔작이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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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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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와 태진(지진희)은 일란성 쌍둥이로 쏙 닮은 외모만큼 사이 좋은 형제다. 하지만 형제의 우정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어린 시절, 굶주림에 지친 태수가 마약 조직 보스 구양원(문성근)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태수 대신 태진이 구양원에게 붙잡혀 갔기 때문이다. 판박이로 빼 닮은 얼굴과 달리 둘의 인생은 그렇게 엇갈린다. 그 후 19년. 그 사이 태수는 ‘해결사 수’란 이름의 청부살인업자로 자랐고, 구양원의 그늘 아래 자란 태진은 환경을 거스르며 경찰이 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던 형제가 오랜 세월을 건너 드디어 얼굴을 마주한 날, 태진은 태수가 보는 앞에서 머리에 총을 얹어 맞고 죽는다. 누가 태진을 죽였나? 그 비밀을 캐기 위해 태수는 스스로 태진이 돼 태진의 삶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태수의 이 지난한 복수극 안으로 구양원과 그의 조직원 점박이(오만석), 태진의 애인 강미나(강성연)와 해결사 ‘수’를 쫓는 부패 경찰 남달구(이기영)가 걸어 들어온다.
국내 관객에게 <피와 뼈 Blood and Bones>로 알려진 재일 한국인 감독 최양일은 일본영화계에서 ‘하드보일드영화라면 역시 최양일이 적임자다’라는 말을 듣는 인물이다. 그리고 <수>는 그런 최양일 감독의 장점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영화다. 지하주차장을 지그재그로 오가는 자동차 폭주 신으로 시작해 칼과 일본 검, 쇠파이프와 총이 춤추는 가운데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액션 신으로 끝을 맺는 <수>는 영화 내내 ‘피범벅’ 액션을 선보인다. 여기에 ‘액션의 합’이란 말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최양일 감독이 짜맞추는 액션은 ‘때린 데 또 때리고, 찌른 데 또 찌르는’ 피와 살, 그리고 뼈가 맞닿는 진짜 싸움이다. <수>를 가득 채운 이 ‘핏빛’ 액션은 영화의 장르를 결정짓는 요소인 동시에 영화의 주제를 이룬다. 태수는 자신의 잘못으로 조직 폭력배에게 끌려간 동생에 대한 ‘속죄 의식’을 칼에 찔리고 총을 얻어 맞는, 이 지루하고 힘든 싸움으로 대신한다. <수>는 동생을 죽인 이를 향한 잔인한 복수극인 동시에 살과 뼈를 깎으며 얻어낸 처절한 속죄 의식인 것이다. [키드갱]으로 유명한 만화가 신영우의 원작 만화 [더블 캐스팅]이 주인공을 영웅주의적으로 묘사했다면 최양일은 여기에서 영웅의 기개를 발라내고 나약한 인간을 가져다 놓았다.
눈알이 뽑히고 뇌수가 튀어나오는, 극단의 폭력 묘사가 <수>의 가장 큰 매력이라면 허약한 드라마 줄기는 <수>의 가장 큰 단점이다. 동생에 대한 태수의 죄책감은 짐작하는 바지만 처절한 복수극을 끌고 갈 만큼의 충분한 정서적 공감은 끌어내지 못한다. 태진의 애인인 미나가 태수에 대해 보이는 ‘애증’의 감정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 태진의 죽음을 둘러싼 배후 인물들이 밝혀지는 과정의 단서들 역시 복선으로 쓰이기엔 어설픈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기존의 ‘젠틀’한 이미지를 벗어 던진 지진희는 과감한 액션 연기가 돋보이지만 해결사 수에 강한 카리스마를 입히는 덴 부족함이 엿보인다. <왕의 남자>에서 요염한 장녹수를 연기한 강성연은 의지가 강한 여경찰 강미나가 돼 남자 못지않은 강도 높은 액션 연기를 선보인다. 여기에 마약 조직 보스를 연기한 문성근의 비열함이 관객을 소름 돋게 만든다. 뮤지컬과 TV 드라마를 종횡무진 하고 있는 오만석도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원의 ‘강단’을 완벽히 연기한다.
HOT 하드보일드, 하드고어 액션영화로서의 매력이 가득하다. ‘핏빛’ 향연을 꿈꾸는 관객에게 이보다 더 좋은 영화는 없다.
COLD 눈알이 뽑히고, 목울대로 끊임없이 피가 솟구쳐 나오는. 베고 자르고 찌르고 쏘는, ‘날 것’의 액션에 익숙지 않은 관객들은 살짝 속이 울렁일 수도 있겠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타인의 삶> - One & The Other
때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 전인 1984년, 나라와 자신의 신념을 맹목적으로 고수하는 원칙주의자 비밀경찰 비즐러(울리쉬 뮤흐)는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과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크리스타(마르티나 게덱)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 대신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에 감동받고 사랑을 느끼며, 이전의 삶과는 다른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은 동독 정부에 의한 국민의 인권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84년 겨울, 이야기가 시작된다. 더 이상은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공산주의 체제가 망가질 즈음, 동독 정부는 이를 막아보고자 동독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끝없는 복종을 강요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5년전인 1984년을 배경으로 하는 <타인의 삶>은 우익으로 낙인찍힌 극작가 게오그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악랄한 비밀경찰 비즐러의 이야기다. 여기서 '타인의 삶'이라는 제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 최고의 도청 전문가로 손꼽히던 최고의 특수 경찰 비즐러는 국가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던 그런 원리원칙적인 사람이다. 지난 20년 동안 비즐러는 수백의, 아니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감시하고 도청해 왔지만, 그에게 그들은 철저히 타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국가에 해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의 삶을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관찰하고 부기해 왔다. 하지만 게오르그의 경우는 다르다. 게오르그를 도청하면서 비즐러는 더 이상 관찰자의 위치에 만족하지 못한다. 점차 게오르그의 일상과 대화에 공감하기 시작하면서 비즐러는 적극적으로 그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게오르그의 책상에 놓여진 '브레히트 선집' 을 훔쳐 읽으며, 게오르그가 연주하는 '선한 사람들의 소나타'를 도청기를 통해 훔쳐 들으며 비즐러는 그가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1973년생 감독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의 장편 데뷔작 <타인의 삶>은 이처럼 우연히 엮인 관계로 인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풀어낸다. 러닝타임 137분을 계속 정공법으로 일관하는 탓에, 중반 이후 이야기의 종착점이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하다는 약점도 눈에 밟힌다. 그러나 세바스티안 코치와 마르티나 게덱 등 두 배우의 호연은 영화의 고루하고 따분함을 상쇄하고도 남으며, 특히 비즐러 역의 울리쉬 뮤흐의 연기는 실로 압권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는 <타인의 삶>을 통해 미니멀리즘의 연기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배우다.
HOT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을 비롯 <타인의 삶>은 유수의 해외영화제와 시상식을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또한 여전히 남과 북으로 분단된 상황에 처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극 중 이야기는 절대 남 이야기같지 않다.
COLD 언제나처럼 그렇듯 문제는 배급 규모. 또한 유럽 영화라면 보지도 않고 일찌감치 손사래를 치는 국내 관객들의 관람 성향도 흥행에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넘버 23> - 숫자 놀이와 허황된 반전의 결합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프랭클린 델라노 루즈벨트. 세 미국 대통령의 이름은 모두 23개의 알파벳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1941년 12월 11일, 미국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고, 히틀러는 1945년 4월에 자살했다. 12와 11을 더하면 23이 나오고, 1과 9, 4, 5, 4를 모두 더하면 23이 된다.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2001년 9월 11일의 숫자를 2+0+0+1+9+11로 계산하면 역시 23이 만들어진다. 살인마 찰스 맨슨은 11월 12일에 태어났고, <양들의 침묵 The Silence of the Lambs>의 한니발이 나오는 데 모티브를 제공한 테드 번디는 1월 23일에 처형됐다. 고대 마야인들은 지구의 종말이 2012년 12월 23일에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23의 숫자 놀이는 영화 <넘버 23 The Number 23>의 제작진들로 이어진다. 조엘 슈마허와 짐 캐리의 알파벳 글자수를 더하면 23이 나오고, 버지니아 매드슨과 짐 캐리를 더해도 23이 된다. <넘버 23>은 조엘 슈마허의 23번째 작품이다.
이 정도면 <넘버 23>이 어떤 영화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숫자 23에 관한 편집증적 집착이 <넘버 23>을 관통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는 동물관리센터에서 일하는 평범한 노동자다. 생일인 2월 3일 개에게 물리는 사고를 당한 후 월터는 이상한 일을 겪기 시작한다. 생일선물로 아내(버지니아 매드슨)에게 받은 소설 [넘버 23]이 그 시작이다. 숫자 23의 저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된 소설 속 주인공인 핑거링(짐 캐리)과 자신의 삶이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월터는 점점 편집증에 가까운 망상에 사로잡히고 자신을 둘러싼 숫자들이 온통 23으로 조합이 가능함을 알게 된다. 급기야 소설 속 주인공처럼 자신도 살인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 믿게 된 월터는 부인을 살해하는 꿈까지 꾸게 된다. 월터가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소설 [넘버 23]에 숨어 있는 비밀을 추적하는 것이다. 소설의 작가 톱시 크레츠를 추적하던 월터는 소설 속 살인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고 살인사건을 일으킨 범죄자가 작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넘버 23>은 음모 이론이나 숫자 놀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미끼를 던지며 시작한다. 불길한 역사 속에 담긴 숫자 23의 예들이 나열된다. 단순한 숫자 놀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숫자로 23을 꿰어 맞추는 논리는 제법 흥미롭다. 숫자 23의 법칙에 흥미를 느낀다면 월터가 소설 [넘버 23]에 몰입해 가는 과정에 동화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뻔히 예견되는 결말의 반전이다. 영화의 소재와 달리 <넘버 23>은 결코 숫자 23과 연관된 수학적 추리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사건과 이를 비밀스런 반전으로 삼은 스릴러의 뻔한 트릭만 존재할 뿐이다. 짐 캐리와 버지니아 매드슨은 1인 2역을 하며 연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반전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댄 영화의 허술함 탓에 빛을 발하지 못한다. 조엘 슈마허 감독은 몽환적인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현실과 소설 속 이야기를 연결시키지만 이 또한 허황된 스토리 때문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그나마 이 영화를 최대한 즐기고 싶다면 결말 부분 직전에 극장에서 나오는 게 좋을 것이다.
HOT 숫자 23의 법칙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처음으로 스릴러에 도전한 짐 캐리의 1인 2역 연기도 관심을 끌 만하다.
COLD 결말 부분의 허황된 반전이 극적 흥미를 잃게 한다.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도 그리 매끄럽지 못하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향수> - 향을 보여드립니다
서른 넷에 한 극단의 제의로 쓴 희곡 [콘트라베이스]로 주목 받기 시작한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그는 1985년, ‘향기’에 미친 한 남자의 연쇄 살해극 [향수]를 출간한다. 뛰어난 후각의 소유자 ‘장 그르누이’가 향기를 찾아 연쇄 살인에 이르게 된 사연을 담은 이 책은 전세계 45개 언어로 번역돼 1,500만부의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스테디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다. <레지던트 이블 Resident Evil> 시리즈의 제작자 번드 아이킨거는 책이 출간된 해, [향수]를 영화로 옮길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영화화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번드 아이킨거가 그를 설득해 판권을 구입하는 데 든 시간은 무려 15년. 이후 스탠리 큐브릭, 팀 버튼 등의 감독이 이 ‘향기 살인마’에 눈독을 들였지만 결국 연출은 <롤라 런 Lola Rennt>의 톰 튀크베어에게 맡겨졌다.
18세기 프랑스, 생선 비린내 가득한 시장통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맡은 냄새는 코를 찌르는 생선 냄새. 이렇게 태어난 사내아이는 세상 누구보다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다. 청년으로 자라난 장 그르누이(벤 위쇼)는 어느 날, 과일 바구니를 든 한 여인에게서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향기를 맡는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매혹적인 향을 경험한 그르누이. 그는 그 향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다니다 퇴물 향수 제조사 주세페 발디니(더스틴 호프만)와 만난다. 하지만 발디니의 향수 제조법도 그르누이의 욕망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르누이가 간직하고 싶은 향은 장미나 라벤더가 아닌, 살아있는 육체가 뿜어내는 향이기 때문이다. 결국 향을 간직할 방법을 찾아 ‘향수의 낙원’이라 불리는 프랑스 남동부 그라스로 향한 그르누이. 그곳에서 그는 수많은 여자들을 향기를 얻기 위한 재료로 이용하기 시작한다. 세상 하나밖에 없는 그르누이의 ‘향수 컬렉션’이 쌓여가는 동안, 여인들은 차례 차례 주검으로 발견된다.
섬세하고 세밀한 언어로 향기를 기록한 소설 [향수]를 영화로 옮길 때 가장 큰 난관은 이야기의 소재인 향 그 자체였다. 시각 예술인 영화가 후각의 느낌을 담아내긴 쉽지 않은 법. 톰 튀크베어는 영화에 향을 새기기 위해 오히려 시각을 더 자극하는 방법을 택했다. 구역질 나는 시장통의 비린내를 표현하기 위해 생선 내장을 늘어놓는 건 물론 구더기가 들끓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향수 한 방울의 향기를 표현하기 위해 화면 전체를 꽃밭으로 뒤덮는다. 향기를 찾아나선 그르누이의 발길을 따라 장미와 라벤더가 피고 지는 사이, 관객은 자연스레 자신의 기억에 남아있는 수많은 향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영화 말미, 단두대에 올라선 그르누이가 여인들의 향으로 만든 향기를 퍼트리는 순간 <향수 Perfume: The Story of a Murderer>의 탐미주의적 시선은 폭발한다. <향수>는 소설 속 문자가 만들어낸 '향기의 향연'을 옮겨내기 위해 향에 취한 750명 엑스트라를 '문자 그대로' 옷을 벗고 뒹굴게 한다. 이렇듯 <향수>는 문자로 그려진 모든 상상, 후각의 느낌까지 모조리 시각으로 빚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 <레이어 케이크 Layer Cake> 등에 출연한 신예배우 벤 위쇼가 장 그르누이의 절제된 감정 묘사를, 할리우드 중견배우 더스틴 호프만이 한물간 향수 제조사의 능청스런 표정 연기를 더해 <향수>를 시각적으로 더욱 즐겁게 만든다.
HOT 꼼꼼한 기록으로 재현해낸 18세기의 풍경, 꽃내 진한 향수 제조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매력은 충분하다.
COLD 향수도 너무 짙으면 쉽게 질리는 법. 차고 넘치게 보여주는 영상미가 오히려 관객의 ‘상상’의 범위를 제한한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 달콤하지 않은 로맨틱 코미디
정말 남자는 화성에서 오고 여자는 금성에서 온 걸까? 그렇게까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걸까?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The Break-Up>(이하 '<브레이크 업>')는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시카고에서 버스 관광 가이드를 하는 게리(빈스 본)와 브룩(제니퍼 애니스톤)은 사귄 지 2년 된 커플. 게리가 야구장에서 만난 브룩에게 첫눈에 반해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펼쳐 연인이 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사는 모습은 사랑에 빠진 순간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화하며 서로에 대한 오해를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게리와 브룩의 말다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브룩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는 지경에 이른다. 서로 구할 집을 찾는 동안 어색한 동거생활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만 그마저도 서로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브레이크 업>은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주로 그리는 여느 로맨틱 코미디와 달리 사랑이 시작된 후에 초첨을 맞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연애할 때는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던 서로의 단점들이 함께 살면서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의 행동과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는 상대방 때문에 화를 내는 일이 잦아진다. 이처럼 <브레이크 업>은 낭만적이고 달콤한 연애 시절 이야기 대신 함께 생활하게 된 연인이 상대방의 단점을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영화는 수많은 연인들이 헤어지는 이유가 사랑이 끝나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라고 주장한다.
<브레이크 업>은 서로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다른 생각을 하는 남자와 여자의 갈등을 생생하게 묘사해낸다. 게리와 브룩이 서로 오해하며 헤어지게 되는 과정은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브링 잇 온>의 페이튼 리드 감독은 실제 커플들의 인터뷰를 통해 완성한 현실감 있는 시나리오를 생생하게 스크린에 옮겨냈다. 코미디연기에 재능을 보여온 빈스 본과 '브래드 피트의 여자'로 더 유명세를 탔던 제니퍼 애니스톤의 실감나는 연기는 영화에 활력을 더한다.
HOT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풀어놓는다.
COLD 달콤한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은 시종일관 다툼으로 일관하는 연인들의 이야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빼꼼의 머그잔 여행> - 온몸으로 웃기는 애니메이션
겁 많은 어린 아이 베베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 세계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는 거대한 머그잔을 불러오는 신비한 힘을 지닌 마법 펜던트를 선물로 받는다. 마법 펜던트에서 튀어나온 머그잔이 베베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북극. 베베는 그곳에서 말썽꾸러기 곰 빼꼼과 미녀 펭귄 도도, 신사 펭귄 꽁꽁을 만난다. 빼꼼과 꽁꽁은 도도를 놓고 사랑 싸움을 벌이는 라이벌이라 하루라도 조용한 날이 없다. 춥고 낯선 북극에 도착한 베베는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지만, 마법 펜던트는 베베와 일당들을 계속 엉뚱한 곳으로 떨어뜨려 놓는다. 사막에서 만난 멋쟁이 도마뱀 후다닥이 이들의 세계여행에 합세하면서 베베의 여정은 끝이 없어 보인다.
EBS와 투니버스에서 방영 중인 단편 애니메이션 시리즈 <빼꼼>을 영화화한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3세에서 8세 사이의 어린이들을 타깃으로 한 유아용 애니메이션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만큼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모든 캐릭터들은 대사 없이 표정과 몸짓 그리고 단순한 효과음 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 아이 베베는 표정 만으로도 절박함이 담겨있고, 미녀 펭귄 도도를 향한 빼꼼과 꽁꽁의 좌충우돌한 몸짓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나 3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빼꼼>을 대사가 전혀 없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옮기기엔 영화의 호흡이 다소 길어 보인다. 말 없는 머쓱한 상황을 보완하는 것은 <빼꼼의 머그잔 여행>의 완성도 높은 컴퓨터 그래픽. 빼꼼이 낙하산을 메고 하늘에서 활공하는 장면이나 마법 펜던트를 놓고 지하 동굴에서 벌어지는 승부는 긴장감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100% 국내 기술로 만들어 진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일보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HOT 대사 없이 진행되는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온몸으로 보여주는 위트는 하나의 언어가 되어 신선한 웃음을 제공한다.
COLD 각 에피소드들은 유기적인 관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슬랩스틱 류의 단발적인 웃음을 선사하는 것은 <빼꼼의 머그잔 여행>에 단점으로 작용한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22 개봉작 리뷰] <내 여자의 남자친구> - 연애의 달인과 내숭 100단이 만났다
방송국 PD인 석호(최원영)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연애의 달인이다. 석호의 이번 데이트 상대는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여대생 채영(김푸른). 석호는 특유의 자상함과 아낌없는 금전봉사로 채영을 보살피지만, 그의 본심은 그저 채영과의 하룻밤이다. 석호는 이리저리 작업을 걸어본다. 스킨십도 강도를 올려보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모텔에 차를 세워보지만 채영에게 돌아오는 말은 “미쳤어?” 한마디. 살갑지 않은 채영의 반응에 석호의 불만이 나날이 쌓여만 간다. 한편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할 만큼 능력있는 사진작가 지연(고다미)은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선수(이정우)와 원나잇 스탠드를 나눌 만큼 대담한 연애를 지향한다. 하지만 지연은 예전부터 만나오던 석호에게 마음이 가는 것을 느끼고 이들의 관계는 조금씩 복잡해져 간다.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여섯 명의 등장인물이 얽혀있는 연애의 속사정을 하나씩 풀어가는 영화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Pulp Fiction>과 가이 리치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의 이야기 구조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박성범 감독은 피와 대사의 향연 대신 섹스로 얽힌 이들의 연애담을 나열해 놓는다. 그러나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펄프 픽션>과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같은 치밀한 구성의 영화가 아니다.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영화는 동일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서술되며 이들의 실체를 풀어갈 뿐이며, 남녀의 알콩달콩한 연애심리를 잡아냈던 영화 초반에 비해 영화의 후반은 질펀한 섹스 신으로 채워진다. 그 결과 이야기는 후반으로 갈수록 두터워지지만 오히려 깊이는 후반으로 갈수록 얕아진다.
하지만 <내 여자의 남자친구>의 주연배우들은 개성강한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 낸다. 석호 역을 맡은 최원영의 능청스런 연기가 단연 압권이며, 청순가련과 내숭을 오가는 김푸른의 호연도 돋보인다. '현대생활백수'로 유명한 개그맨 고혜성이 연애와 담쌓고 지내는 어수룩한 영수 역을 맡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HOT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뤄진 <내 여자의 남자친구>는 다양한 연애의 유형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담겨있는 작품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해 가는 이들의 연애담에 결말을 예측해 보는 것도 이 영화의 재미.
COLD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나선 작품이지만 원나잇 스탠드 같은 가벼운 사랑이야기를 다룬 만큼 잔잔히 울려 퍼지는 감동은 적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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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3월3주, 개봉영화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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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0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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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영국 런던의 한 사교 파티장. 도도한 아가씨 키티(나오미 왓츠)는 그곳에서 수줍음 많은 청년 월터(에드워드 노튼)와 만나 결혼한다. 첫눈에 반한 사랑? 그런 건 아니다. 키티를 향한 월터의 마음은 뜨겁지만 키티는 월터를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나이가 됐을 뿐이다. 하지만 키티에게도 사랑은 찾아온다. 문제는 그것이 남편이 아니라는 것. 세균학자인 월터와 함께 떠난 중국 상하이에서 그녀는 또 다른 사랑을 만난다. 총독부 관리 찰리(리브 슈라이버)를 사랑하게 된 키티는 남편 몰래 그와의 사랑을 키운다. 물론 이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월터는 키티에게 간통죄로 고소 당할 것인지, 콜레라가 한창인 중국 오지 ‘메이탄푸’로 자기와 함께 떠날 것인지를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사회적 명성을 중요시하는 찰리에게 외면당한 키티는 결국 월터와 함께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메이탄푸로 길을 떠난다.
<페인티드 베일 The Painted Veil>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옮긴 작품. 불륜을 이야기의 축으로 한 소설 [인생의 베일]은 삼각구도의 사랑이란 소재부터 영화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인생의 베일]은 세 번에 걸쳐 영화로 옮겨졌다.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가 호흡을 맞춘 <페인티드 베일> 이전에 그레타 가르보가 키티로 분한 <페인티드 베일 The Painted Veil>(1934)과 <세븐스 씬 The Seventh Sin>(1957), 두 편이 이미 영화로 만들어졌다.
<페인티드 베일>은 원작의 이야기 줄기를 거의 그대로 옮긴다. 하지만 색채는 달라졌다. 불륜을 소재로 인간의 뒤틀린 욕망과 사랑의 미묘한 심리를 묘사하는 데 치중한 소설과 달리 영화 <페인티드 베일>은 화해와 용서에 초점을 둔다. 아내의 외도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월터와 애초 월터에게 사랑의 감정 따윈 느끼지 못했던 키티는 죽음의 도시, 메이탄푸에서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 나간다. <페인티드 베일>은 이렇듯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을 완성해가는 키티와 월터의 성장담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로 아쉬울 것 없는 틀을 갖췄지만 인간 욕망의 복잡다단함을 그린 원작의 맛이 바랜 것도 사실이다. 월터가 죽고 난 후 홍콩으로 돌아와 또 한번 찰리와 관계를 맺는 키티의 ‘욕망’으로서의 사랑, 키티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월터의 두려움, 자살일지도 모를 월터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모두가 영화에선 지워지고 없다. 대신 뒤늦게 깨닫게 된 사랑의 애달픔만이 남았을 뿐이다.
<페인티드 베일>의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두 주연배우의 호연. 에드워드 노튼은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의 아린 마음을 차가운 시선 안에 녹여내고, 나오미 왓츠는 뒤늦게 사랑을 깨닫게 되는 여인의 심리를 완숙하게 표현해낸다. 수묵 채색화를 보는 듯한 중국의 아름다운 산하, 올해 골든글로브 음악상을 수상한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잔잔한 음악 선율도 <페인티드 베일>을 풍성하게 만든다.
HOT 가슴 아픈 러브 스토리로 손색이 없다. 화이트 데이에 개봉하니 '연인 관객'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COLD 서머셋 모옴의 원작 소설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불완전한 사랑의 심리는 사라지고 잘 다듬어진 사랑만 남았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300> - 헤모글로빈과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액션 스펙터클
BC 480년.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제라드 버틀러)는 페르시아 제국의 사신으로부터 페르시아 왕에게 무릎을 꿇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 듣는다. 자유와 명예를 위해 사는 스파르타인에게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 레오니다스는 사신의 목숨을 빼앗고 전쟁을 준비한다. 원로회의 반대로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할 수 없게 된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정예 용사들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향한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의 100만 대군은 아무리 천하무적의 스파르타 정예군이라 해도 무찌르기 힘든 중과부적이다. 테스피스 군의 지원 아래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향한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용사는 가족과 나라의 자유를 위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한다.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영화화한 <300>은 BC 5세기에 페르시아 제국이 시도했다가 실패한 그리스 원정 전쟁을 그린 작품이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프랭크 밀러에게 영감을 제공한 1962년작 <300 스파르탄 The 300 Spartans>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역사적인 사실을 극화한 작품이기에 영화의 내용은 이미 알려진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치고는 내용도 단순하다.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군과 100만 페르시아 대군의 전투.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페르시아 대군의 파상 공세에 맞서 용맹하게 싸워 나가지만 결국 전원 전사하고 만다. 이미 노출된 내용에 단순한 이야기지만, <300>은 직설적이고 장식적인 방식으로 역사 속 전설을 풀어간다. 다소 과장 섞인 듯한 묘사와 표현은 <300>의 단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오락용으로서는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한다.
<300>은 근래 보기 드물게 남성 호르몬이 넘쳐나는 영화다. 추가 파병을 둘러싼 왕비와 의회의 갈등 같은 드라마적 요소도 있지만, 영화의 대부분은 전쟁 신으로 채워져 있다. 여성성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근육질 마초맨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우레 같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전사들의 강인함은 스파르타라는 도시를 대변하는 동시에 대단한 스펙터클로 기능한다. 여기에 회화와 만화의 중간쯤 되는 미장센은 정교한 그래픽 노블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안겨준다. 이미지의 어두운 부분을 뭉개서 컬러의 컨트라스트를 바꾸는 크러쉬 기법은 구릿빛 영상에 신비감을 더한다. 마치 비디오 게임처럼 단순한 내용이지만 역사적 박진감과 남성적 매력, 화려한 영상이 어우러져 <300>은 킬링타임용 영화로서 최고의 성능을 발휘한다.
HOT 단순 명쾌함이 강점인 영화. 화려한 비주얼과 남성적 매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COLD 비디오 게임처럼 단순한 이야기에 과장된 스타일이 반감을 살 수 있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리틀 러너> - 기적을 향해 달리는 소년
여기 기적을 위해 달리는 소년이 있다. 랄프는 혼수 상태로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를 깨우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리틀 러너 Saint Ralph>는 열네 살 소년 랄프(아담 버처)가 기적을 향해 달리는 이야기를 다룬다. 주인공 랄프는 말썽꾸러기다. 카톨릭계 사립학교 학생인 랄프는 몰래 담배를 피우고, 수영장에서는 여자 탈의실을 훔쳐보고, 자위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엄격한 교칙을 위반하기 일쑤인 랄프는 고해성사로 용서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뻔뻔한 소년이다. 그러나 제멋대로인 랄프도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아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는 병세가 악화돼 혼수상태에 빠지고 만다. 엄마를 살릴 길은 기적밖에 없다는 말에 랄프는 상심에 빠진다. 랄프는 그러나 "보스톤 마라톤에 출전해 우승하면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코치의 말을 듣고 그때부터 마라톤에 매달린다. 주위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달리는 랄프의 정성에 감동한 전직 캐나다 최고 마라토너 허버트 신부(캠벨 스코트)가 랄프의 코치를 자처한다.
<리틀 러너>는 랄프가 보스톤 마라톤에 출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춰 꿈과 희망이 전이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영화는 학교에서는 왕따이자 말썽꾸러기로 유명한 랄프가 엄마를 깨어나게 하기 위해 막무가내식으로 마라톤에 매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상당한 공을 들인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랄프는 달리고 또 달린다. 사고뭉치였던 탓에 도와주는 사람보다는 비웃는 이들이 더 많은 상황이지만 랄프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엄마가 입원한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친구 클레어(타마라 호프)와 엄마의 담당 간호사 앨리스(제니퍼 틸리)만이 랄프를 지원할 뿐이다. 카톨릭계 학교에서 니체를 강의하는 괴짜 신부 허버트가 뒤늦게 랄프의 개인 코치로 합류해 함께 기적을 만들어나간다.
아픈 엄마를 위해 마라톤에 도전하는 소년의 이야기 <리틀 러너>는 별반 새로울 게 없다. 휴먼가족드라마의 틀 위에 스포츠영화의 박진감을 살짝 덧입힌 영화는 예정된 해피 엔딩을 향해 순조롭게 달려간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틀 러너>는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영화다. <리틀 러너>는 미워할 수 없는 악동 랄프처럼 군데군데 자리한 상투성의 함정을 잔잔한 감동으로 덮어버리는 마력을 지녔다. 500대 1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주인공 랄프 역을 따낸 캐나다 출신 아담 버처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빛나는 조연들의 활약은 영화의 감동을 배가시키는데 단단히 한몫을 한다. 전직 마라토너로 랄프의 코치가 되어준 허버트 신부 역은 <사랑을 위하여 Dying Young>(1991)에서 줄리아 로버츠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캠벨 스코트가 맡아 훌륭한 조력자의 역할을 해내며, 엄격한 교장선생인 피츠 신부는 캐나다의 베테랑 배우 고든 핀셋이 맡아 영화의 무게 중심을 잡아준다. 뻔하지만 감동적인 영화 <리틀 러너>의 각본과 연출은 주로 TV 드라마 연출에 매진해온 캐나다 출신 마이클 맥고완이 담당했다.
HOT 휴먼드라마의 감동과 스포츠영화의 박진감이 조화를 이룬다. 상투적인 소재를 매력적으로 연출한 마이클 맥고완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인다.
COLD 감독과 배우들의 이름이 잘 안 알려진 탓에 아예 관객들이 외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쏜다> - 야단법석 난장판 일탈 드라마
오늘 하루는 박만수의 인생이 180도 뒤바뀌는 날이다. 도덕과 법규의 준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공무원 박만수(감우성)는 정도만을 걷는 바른 생활 사나이. 도대체 융통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박만수는 준법정신과 성실성 하나로 평생을 살아 왔지만 오늘 하루 그 모든 게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건의 시작은 아침부터다. 출근 준비에 정신 없는 만수에게 아내(문정희)는 함께 사는 게 재미없다며 이혼을 요구한다. 난생 처음 지각을 한 만수에게 직장 상사는 상부 지침이라며 정리해고를 통보한다. 내키지 않는 환송회 자리를 박차고 나온 만수는 경찰서 담벼락인 줄도 모르고 노상방뇨를 하다 강력계에서 좌천된 다혈질 경찰 마동철(강성진)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한편, 만수가 체포된 파출소에 병든 홀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벼운 죄를 짓고 교도소를 드나드는 양철곤(김수로)이 들어와 난동을 피우며 소란을 떤다. 아내의 이혼 이야기 때문에 마음이 다급해진 만수는 철곤의 부추김에 도망을 시도하다 다시 붙잡히게 되고, 철곤과 함께 경찰차에 실려 이송되던 중 차량사고가 나는 틈을 타 본격적인 탈주를 시작한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박정우 감독이 <바람의 전설> 이후 두 번째로 연출을 맡은 <쏜다>는 전형적인 박정우 스타일의 좌충우돌 야단법석 액션 영화다.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등 박정우 감독이 썼던 시나리오와 <쏜다>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광복절 특사>처럼 상반된 성격의 두 남자가 탈주를 시작하고 <주유소 습격사건>의 인물들처럼 일탈의 쾌감을 즐긴다. 만수와 철곤은 달리고 부딪치고 깨부수고 총을 쏘아댄다.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는 레이싱카와 도로 위를 질주하는 스포츠카 그리고 여기저기 충돌하는 자동차들. <난다> <간다>로 이어지는 도심난장 3부작 프로젝트의 시작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의 연속이다. 왕복 16차선 도로를 막고 일렬로 정렬한 특수기동대 경찰병력과 그 위를 나는 헬리콥터는 대규모 군중 신으로 영화를 정리하는 박정우 감독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쏜다>의 외양은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와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와 비슷하다. 사건이 전개되는 방식도 두 영화의 조합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모범생 공무원과 효자 범죄자가 만나 평소 자신들을 억눌러왔던 것들을 깨부순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법을 지키는 게 신념이었던 남자와 어기는 게 버릇이었던 남자, 두 사람 모두 가진 게 없는 소시민이고 당하고만 살아온 사회적 약자다. 이들의 일탈은 착하게 사는 것이 손해인 현실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다. <쏜다>를 코미디 영화로 분류하기보다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액션 드라마로 분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하지만 만수와 철곤의 일탈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평범한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드라마로서의 일탈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만수와 철곤의 일탈에만 초점이 맞춰져 두 사람과 경찰 마동철 사이의 긴장은 좀처럼 이어지지 않는다. 만수와 철곤의 계속되는 일탈을 정당화하는 동기가 지속적으로 부여되지 않아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들의 행동은 점점 의미를 잃게 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은 영화에서도 꼭 필요한 원리다.
HOT 시끌벅적한 박정우식 소동극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볼 만한 영화. 달리고 쏘고 깨부수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
COLD 박정우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들처럼 웃기는 영화를 원한다면 실망할 수 있는 영화. 사회적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탈이 영화의 핵심인 것에 반해 일탈의 방식이 너무 단조롭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엘 토포> - 컬트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총잡이 엘 토포(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는 어린 아들과 함께 사막을 횡단하던 중 악당들에 의해 폐허가 된 마을을 발견한다. 엘 토포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점령해 버린 악당들을 찾아내 복수를 펼친다. 치열한 싸움을 마친 엘 토포는 마라(마라 로렌지오)라는 한 여인을 만난다.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마라와 함께 여행길에 오르게 된 엘 토포. 마라는 엘 토포에게 사막에 있는 네 명의 현자와의 대결에서 이기면 사막의 신이 될 것임을 알려준다. 마라의 꼬임에 넘어가 현자를 찾긴 했으나 이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길 수 없음을 판단한 엘 토포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해 현자들을 처치해나간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도 잠시. 엘 토포는 마야의 배신으로 인해 사막 한 가운데 버려진다. 시간이 흘러 엘 토포가 동굴 속에서 깨어난다. 엘 토포는 장애인들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엘 토포는 마을에 버림받고 동굴에 모여 사는 이들을 돕기로 결심한다.
<엘 토포 El Topo>(1970)는 종교, 정치, 문화적인 요소들이 한꺼번에 녹아 들어 있는 영화다. 각 요소들은 영화라는 용광로 속에서 꿈틀대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우선 <엘 토포>는 총잡이가 바람이 폴폴 날리는 사막에서 대결을 펼치는 내용을 그린 전반부와 세상으로부터 소외 받은 자들과 함께 수행을 시작하는 후반부로 나눠진다. 엘 토포가 네 명의 현자들을 찾아가 결투를 벌이는 전반부는 서부극의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고행길에 나선 엘 토포의 수행 여정을 그리는데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마지막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엘 토포의 여정은 고난과 위험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이다. 엘 토포를 그리스도, 네 명의 현자들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로 비유한다는 점에서 <엘 토포>는 성경의 재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엘 토포>는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이 각본, 음악, 미술, 의상, 주연까지 맡는 등 놀라운 괴력을 발휘해 만든 영화로, 그를 세계적인 컬트영화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서부극의 기묘한 변주이기도 하고 기독교 사상과 동양 철학을 뒤섞은 희한한 종교영화이기도 한 <엘 토포>는 신에 대한 흥미로운 재해석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70년 12월 미국 뉴욕의 심야상영관에서 처음 상영된 후 컬트영화 마니아들로부터 폭발적인 지지를 얻은 <엘 토포>는 이후 심야영화의 신호탄이 되어 컬트영화 마니아들의 밤을 밝혀준 영화가 됐다. 그러나 표현 수위와 신성 모독 논란으로 국내에서는 개봉이 불가했던 작품. 이번 국내 개봉은 첫 개봉 후 37년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엘 토포>는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친 깨끗한 필름으로 상영된다.
HOT 컬트영화의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마니아들의 관심을 끌 만하다. 지금까지 정식으로 개봉한 적이 한번도 없는 <엘 토포>를 디지털 리마스터링한 필름으로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 매력.
COLD 영화가 묘사하는 표현 수위가 상당히 높고 성경에 대한 재해석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홀리 마운틴> - 충격적인 이미지의 향연
예수를 닮은 사나이(올라시오 살리나스)가 난쟁이의 손에 이끌려 세상을 배운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이란 군인이 도시를 점령하고 종교가 돈으로 거래되는 암흑과 같은 곳. 복잡한 세상을 정처 없이 헤매던 그는 신비한 지도자(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를 높은 탑에서 만난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지도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일곱 수행원들을 소개받는다. 이들은 태양계의 행성을 각각 대표하고 있으며 사업가, 예술가, 재정고문, 경찰서장, 건축가 등 합법적인 직업을 내세워 세상의 돈을 긁어 모으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속세의 영광 대신 불멸의 삶을 추구한다. 예수를 닮은 사내와 지도자, 그리고 일곱 명의 수행원들은 불멸의 삶을 살고 있는 현자를 찾아 비법을 전수받기 위해 성스러운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홀리 마운틴 The Holy Mountain>(1973)은 충격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영화다. 신비한 지도자가 음산한 주술소리와 함께 나체의 두 여성의 머리카락을 죄다 밀어 대머리로 만드는 장면을 전주곡으로 끔찍한 장면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자신의 눈알을 잡아빼는 남자, 가죽을 벗긴 동물들을 꼬챙이에 꿰서 행진하는 사람들, 예수의 성상을 빵처럼 씹어먹는 사람들 등 섬뜩한 이미지들의 향연이 이어진다. 그러나 충격적인 이미지를 통해 조도로프스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도피하려 들지 말고 현실의 삶에 충실하라는 것. 성스러운 산에 오른 인물들이 보게 되는 것은 허상들로 가득한 현실의 모습이다. 불멸을 찾으러 가봤자 별 것 없다는 감독의 조롱섞인 메시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홀리 마운틴>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전작 <엘 토포 El Topo>를 보고 감동을 받은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의 전폭적인 투자로 만들어 졌다. 소수의 국제영화제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영화관에서 제한 상영된 후 한번도 전세계 배급망을 타 본적이 없는 <홀리 마운틴>은 컬트영화 마니아들의 사이에서 무단으로 불법 복제돼 어둠의 경로로 유통되는 불운을 겪었다. 판권 소유자였던 존 레논의 매니저 앨런 클라인과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불화로 개봉이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분쟁이 뒤늦게 해결되면서 국내에 개봉되는 <홀리 마운틴>이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충격적인 것은 자극적인 영상에 자신의 철학을 진심으로 담아낸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뚝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HOT 조악한 화질의 불법복제 비디오를 돌려보며 <홀리 마운틴>에 열광했던 컬트영화 마니아라면 HD영화로 복원되고 무삭제로 찾아온 이 영화를 거부하기 힘들 것이다.
COLD <홀리 마운틴>은 섬뜩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는 영화다. 잔인하고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15 개봉작 리뷰] <씨 인사이드> - 죽음을 꿈꿉니다
1998년 1월 13일 한 남자가 죽었다. 라몬 삼페드로, 그의 죽음이 유럽을 발칵 뒤집어 놓은 건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없는 전신마비자였기 때문이다. 스물 다섯에 사고로 침대에 누운 이후, 26년. 전신마비자로서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외쳤던 그는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결국 여자친구의 도움을 받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목숨을 끊었다. 카톨릭 신자가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카톨릭 국가 스페인에서 나라를 상대로, 당시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상대로, 유럽 인권재판소와 싸웠던 그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그리고 라몬 삼페드로가 생전에 쓴 책 [지옥으로부터의 편지]를 접한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그의 삶을 영화로 옮기기로 마음 먹는다. <씨 인사이드 Mar Adentro>는 그렇게 태어났다.
라몬 삼페드로(하비에르 바르뎀)는 오늘도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맞는다. 26년 째 똑같다. 수영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그가 꿈꾸는 건 오로지 죽음. ‘삶은 의무가 아닌 권리’라고 생각하는 그는 이제 그 권리를 그만 놓고 싶다. 하지만 전신마비인 그가 죽을 수 있는 방법은 간단치 않다. 안락사를 원하지만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이 이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죽을 권리’를 내세우며 소송에 들어간다. 소송이 진행되고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전해짐에 따라 그의 침대 곁을 찾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소송을 진행할 변호사이자 퇴행성 질환을 앓고 있는 훌리아(벨렌 루에다),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는 씩씩한 여인 로사(롤라 두에냐스)가 그를 찾아오고, 사랑스런 가족들이 그의 곁을 지킨다.
데뷔작 <떼시스 Tesis>와 <오픈 유어 아이즈 Abre Los Ojos>, <디 아더스 The Others> 등 교묘하게 이야기를 꼬고, 반전을 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발휘해온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은 <씨 인사이드>에서 이런 ‘기교’를 모두 버렸다. 침대 위에 묶인 라몬 삼페드로의 ‘상상’을 영화 사이 사이 끼워 넣고 있지만, 전반적으론 죽음에 당도하기까지의 과정을 차분히 옮길 뿐이다. 소송이나 사건을 크게 부각시켜 사건을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라몬 삼페드로의 지난 날을 조용히 돌아보고, 가족들의 따스한 배려를 담아내며, 그가 새로 얻게 된 사랑의 감정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 받고 있음에도 ‘죽고 싶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관객이 귀 기울이게 만든다. 그렇다고 안락사를 무조건 옹호하는 건 아니다.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아픔을 함께 그려 ‘죽음의 권리’가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문제인지를 동시에 고민하게 만든다.
<하몽 하몽 Jamon Jamon> <라이브 플래쉬 Carne Tremula> <햇빛 찬란한 월요일 Los Lunes Al Sol>의 하비에르 바르뎀은 라몬 삼페드로의 아픔을 표정만으로 완벽히 묘사해낸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청산가리를 탄 물을 마시고 죽어가는 이의 얼굴에 생생한 표정을 입혀냈다.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제61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남자연기상을 안겨준 <씨 인사이드>는 같은 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제77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역시 거머쥐었다.
HOT 영화 속, 카톨릭 신부와 라몬 삼페드로의 '죽고 사는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흥미롭다. 유머가 가득한 그 논쟁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COLD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전작들을 좋아한다면 <씨 인사이드>는 너무 싱거울지도 모른다.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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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3월2주, 개봉영화 소개합니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수요일 아침 맞이 하셨나요?
이번주는 어떤영화가 좋을까요?
지난주 드림걸즈를 봤었는데 워낙에 뮤지컬을 좋아하다보니
대부분 노래부르는 장면인 영화가 저는 무척 좋았답니다.
저는 그여자작사 그남자 작곡 이번주에 볼려구요^^
나비효과1편은 잼나게 봤었는데 2편은 역시나 작품평이 안좋더라구요.
이번주까지 춥다고 하니, 감기 조심하시구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2007년 03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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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한 마술사의 환상적인 마술 공연이 시민들의 눈을 사로잡으며 연일 대성황을 이루고 있다. 마술사의 이름은 아이젠하임(에드워드 노튼). 현실과 환상의 벽을 허무는 그의 마술은 왕실에까지 퍼져 황태자 레오폴드까지 그의 마술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아이젠하임은 마술 공연 도중 박진감을 더하기 위해 한 여자 관객을 무대로 초대한다. 무대에 오른 관객인 레오폴드의 약혼녀 소피는 공교롭게도 아이젠하임의 어릴 적 연인이다. 한눈에 성인이 된 소피를 알아본 아이젠하임은 황태자 몰래 위험천만한 사랑을 시작하고, 이를 눈치 챈 레오폴드 황태자는 울 경감(폴 지아매티)에게 아이젠하임을 사기죄로 몰아 체포하도록 지시한다. 아이젠하임과 황태자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팽팽해지던 어느 날, 소피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이젠하임은 황태자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시민들을 동요시키기 위해 죽은 사람의 영혼을 무대 위로 부르는 마술을 펼쳐 보인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스티븐 밀하우저의 단편 [환상마술사 아이젠하임]을 스크린으로 옮긴 <일루셔니스트 The Illusionist>는 마술을 매개로 삼각관계를 다룬 스릴러영화다. 빈 화분에서 꽃이 피어 오르고 객석의 한 부인이 상자에 담은 손수건을 두 마리의 나비가 잡고 나는 등 신비로운 마술 공연이 관객의 눈을 우선 사로잡는다. 무대 위에 설치된 거울 속의 이미지가 실제 이미지와 다르게 움직이거나 죽은 자의 영혼이 홀로그램처럼 나타나는 마술도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아이젠하임이 보여주는 마술은 그와 소피 사이의 비밀스런 로맨스를 더욱 환상적으로 포장하는 장식들로 기능한다. 플롯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마술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트릭 효과만을 위한 반전은 아니기에 반전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금세 알아챌 법한 수준이지만, 마술사의 사랑이라는 영화의 소재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영화의 완성도를 해치는 정도는 아니다.
두 시간짜리 마술 공연처럼 짜여진 이야기만큼이나 관객을 자극하는 것은 20세기 초의 비엔나를 재현한 고풍스러운 촬영과 환상적인 마술 공연을 더욱 신비스롭게 하는 음악이다. 마이크 리 감독과 콤비를 이뤄 <네이키드 Naked>, <비밀과 거짓말 Secrets & Lies>, <베라 드레이크 Vera Drake>를 촬영했던 딕 포프는 영화의 실제 로케이션 장소였던 체코의 프라하를 환상적인 동화 같은 이미지로 필름에 담아냈다. 세피아 톤의 오래된 사진 같은 이미지는 20세기 초의 고풍스러운 유럽 풍경을 회화처럼 그리며 작품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강조한다. 미니멀리즘 현대음악가이자 마틴 스콜세지의 <쿤둔 Kundun>,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 The Hours> 등의 영화음악을 맡아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필립 글래스 역시 음악으로 영화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한 단계 상승시킨다. <일루셔니스트>가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마술이라는 하나의 테마를 위해 기능한다는 점이다. 알고 나면 재미없어지는 마술의 비밀처럼 영화의 반전도 풀리고 나면 허탈해지지만, 이렇게 매끈하게 꾸며진 마술 공연이라면 두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HOT 하나의 마술 공연 같은 반전 스토리와 그 속에 담긴 환상적인 마술 공연에 집중하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COLD 단순히 반전의 효과만을 생각한다면 <식스 센스 The Sixth Sense>나 <유주얼 서스펙트 Usual Suspect> 같은 충격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고경석 기자 (kave@movielink.co.kr)
[3/8 개봉작 리뷰] <봄의 눈> - 일본판 로미오와 줄리엣
가네시로 가즈키의 [고], 카타야마 쿄이치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시바사키 토모카의 [오늘의 사건사고]를 영화로 옮긴 바 있는 ‘책 읽는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 그가 이번엔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을 영상으로 담는다. 유키사다 이사오가 눈독 들인 스토리는 소설 [풍요의 바다] 가운데 1권인 [봄의 눈]. 메이지 유신 시절, 한 남녀의 비극적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귀족 자제인 키요아키(츠마부키 사토시)와 사토코(다케우치 유코)는 어린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친구. 하지만 남녀 사이에 우정을 지켜 나가기란 쉽지 않다. 우정이란 이름 아래 은근슬쩍 사랑이 싹트기 쉽기 때문이다.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덧 청년이 된 두 사람, 사토코는 키요아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키요아키는 사토코에게 친구 이상의 어떤 감정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사토코는 황족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고, 사토코가 다른 사람의 여자가 될 거란 걸 깨달은 키요아키는 뒤늦게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걸 깨닫는다.
엇갈린 사랑의 비극을 담아낸 <봄의 눈 Snowy Love Falln’ in Spring>은 멜로드라마의 ‘전형’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감정선을 가져간다. 사토코에 대한 감정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냥 차가운 키요아키는 너무 늦게 사랑에 눈뜬다.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더욱 간절해진 두 사람. 결혼을 앞두고 ‘불장난’에 가까운 사랑을 나누지만 황족과 얽혀있는 이들의 사랑을 서로의 집안이 가만 둘 리 없다. 엇갈린 감정, 집안의 반대, 거기에 불치병과 순애보가 겹쳐진 <봄의 눈>은 비극의 모든 요소를 끌어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비극의 요소를 갖췄다고 비극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사랑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이성적이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하던 키요아키가 순애보에 눈물 흘리기까지,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영화는 전혀 잡아내지 못한다. 때문에 사토코에 대한 키요아키의 사랑은 다른 남자에게 사토코를 주고 싶지 않다는 ‘뒤틀린 심리’ 이상의 진실함을 담아내지 못하고,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이들의 감정은 영화에 애잔함을 새기지 못한다.
웃음이 매력적인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가 오랜만에 웃음을 지우고 키요아키의 복잡한 심리를 담담하게 연기했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 Be with You>의 다케우치 유코가 아픈 사랑의 감정을 새긴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자연 풍광도 두 배우와 함께 <봄의 눈>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국내 관객과 만난 바 있는 <봄의 눈>은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하이퍼텍 나다에서 단독 개봉한다.
HOT 츠마부키 사토시와 다케우치 유코, 두 배우의 자태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COLD 지난 달, 이미 DVD가 국내 출시됐다. 굳이 극장을 찾아갈 수고를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8 개봉작 리뷰] <스모킹 에이스> - 분출하는 폭력의 미학
여기 세계 최고 킬러들의 표적이 된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스라엘(제레미 피븐). 라스베가스에서 카드 마술사로 일하고 있던 이 남자는 자신을 보살펴 준 마피아 조직을 배신하고 또 다른 범죄조직을 키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마피아의 대부 스파라차(조셉 루스킨)는 이스라엘의 심장에 현상금 100만 달러를 내건다. 그의 심장을 먼저 가져온 자에게 현상금이 주어진다는 소문은 킬러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지고, 이스라엘의 주위에 전문 킬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한편, 이 사실을 알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스라엘은 FBI에게 마피아의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다. FBI는 이스라엘을 킬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메스너(라이언 레이놀즈) 요원과 캐루터스(레이 리오타) 요원을 그가 은신하는 카지노 호텔로 파견한다.
<스모킹 에이스 Smokin' Aces>는 거침없는 폭력 연출과 다양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영화다. 이스라엘의 목숨을 지키려는 FBI요원들에서 나치를 신봉하는 미치광이 삼형제, 여성 이인조 킬러, 위장술로 얼굴을 바꾸는 킬러 라즐로(토니 프래너건), FBI와 마피아 사이에서 이스라엘을 빼내달라는 의뢰를 받은 듀프리(벤 애플렉)까지 다양한 캐릭터들이 독특한 개성을 선보이며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이들은 칼, 권총, 전기톱 등 각양각색의 무기를 활용해 피의 향연을 펼쳐보인다. 여기에 더해 화려한 출연진의 연기도 눈여겨볼 만하다. 벤 애플렉의 심드렁한 표정연기는 단연 압권이며, FBI 부국장역을 맡은 앤디 가르시아, 마약에 찌들어 살며 죽음에 대한 불안을 호소하는 이스라엘 역의 제레미 피븐, 여성 킬러 역을 맡은 R&B 가수 알리샤 키스의 호연은 영화에 매력을 더한다.
<스모킹 에이스>의 메가폰을 잡은 조 카나한은 디트로이트 마약수사대의 이야기를 치밀한 구성으로 엮은 <나크 Narc>로 연출력을 인정 받은 신예감독이다. 폭력을 다루는 조 카나한의 유려한 솜씨는 <스모킹 에이스>에서도 빛을 발한다. 총이 몸에 맞는 순간부터 몸이 넘어가는 모습까지 섬세하게 잡아낸 사실감 넘치는 액션 연출은 <스모킹 에이스>의 백미. 폭력의 미학을 풀어놓는데 집중하는 <스모킹 에이스>는 박진감 넘치고 화려한 액션을 얻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섯 팀이나 되는 킬러 집단의 에피소드를 한데 엮지 못한 채 나열하는 데 그침으로써 짜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무의미한 총격신과 폭력 신에 치중하다보니 영화 후반 드러나는 반전도 설득력이 약하다. “다양한 사건과 많은 등장 인물이 얽히면서 하나의 스토리로 모아지는 치밀한 액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조 카나한 감독의 야심은 아쉽게도 이야기의 완성도보다는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HOT 현상금을 놓고 경합을 벌이는 킬러가 무려 다섯 팀이다. 쉼 없이 터지는 리얼한 총격신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COLD <나크>의 치밀하고 정교한 반전을 기대한 관객이라면 <스모킹 에이스>의 성긴 결말에 실망할 여지가 크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3/8 개봉작 리뷰] <마미야 형제> - 형제는 유별났다
<냉정과 열정 사이 Between Calm and Passion> <도쿄타워 Tokyo Tower>의 원작자 에쿠니 가오리의 사랑 얘기가 또 한번 영화로 옮겨진다. 남녀간의 로맨스에 초점을 둔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사랑 얘기다. 제대로 된 연애 한번 못 해본 형제의 어설픈 ‘데이트 프로젝트’가 <마미야 형제 The Mamiya Brothers>의 기본 이야기 줄기를 이루지만 사랑보다 형제의 우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다. ‘마미야 형제’의 형, 아키노부(사사키 쿠라노스케)는 맥주개발 연구원. 동생 테츠노부(츠카지 무가)는 초등학교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있다. 각자의 회사 생활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의 90% 이상을 함께 하는 이들 형제의 취미는 그래서 거의 똑같다. 야구 기록을 꼼꼼히 기억하고, 밤새 영화를 보며, 기분이 울적할 땐 신칸센 열차를 바라보며 기분을 달랜다. 이들의 ‘완벽한’ 일상에 딱 하나 흠이 있다면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 그래서 형제가 머리를 맞댔다. 카레 파티에 여자를 초대하기로. 단골 비디오가게 점원인 나오미(사와지리 에리카)와 테츠노부의 학교 여교사 요리코(도키와 타카코)가 초대 목록 1순위다.
이제부터 마미야 형제의 화려한 ‘작업’이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다면 잘못 짚었다. 여자에게 인기 없는 형제가 사랑을 얻기 위해 벌이는 좌충우돌, 고군분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마미야 형제>는 그보다 형제의 일상에 더 관심이 많다. 매일 매일 건강을 체크하는 소심함과 다섯 살 이하 꼬마나 즐거워할 것 같은 ‘가위 바위 보’ 놀이에 까르르 웃어 젖히는 순수함, 잠들기 전 하루 일을 곱씹어 보는 ‘반성회’에서 하루의 기쁨을 찾는 귀여운 구석까지 형제의 일상이 섬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랑은 곁가지, 형제의 엉뚱한 일상이 만들어내는 웃음이 핵심인 셈이다. 물론 엉뚱하고 희한한 취향으로 무장된 형제의 일상은 충분히 재미있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일상도 계속 반복되면 지루한 법. 별다른 극적 사건 없이 자질구레한 사건들을 반복해 보여주는 <마미야 형제>는 그래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찰기도, 유머의 힘도 잃고 만다.
단조로운 이야기에 생기를 입히는 건 ‘형제’들의 힘. <하얀거탑> <이혼변호사> 등 주로 TV 드라마에 얼굴을 비쳐온 사사키 쿠라노스케와 개그 콤비 ‘드렁크 드래곤’ 멤버인 개그맨 출신 배우 츠카지 무가는 연애엔 젬병인 남자들의 주눅든 심리를 완벽하게 묘사하며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또한 형제의 ‘여자’가 된 <박치기! We Shall Overcome Someday>의 사와지리 에리카의 귀여운 연기를 볼 수 있는 것도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재미. <실락원 Paradise Lost> <가족 게임 The Family Game>의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이 연출한 <마미야 형제>는 지난해 5월 일본 개봉 당시, 고작 11개 스크린에서 상영됐지만 5개월간 ‘롱런’하며 4억엔의 흥행수입을 얻어냈다.
HOT 인기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팬들이라면 엉뚱 형제의 '스크린 귀환'에 미소 지을 것이다.
COLD 연애엔 젬병인 ‘찌질이’ 형제. 남의 얘기 같지 않은 이 ‘궁상’을 영화로까지 보고 싶을까?
박아녜스 기자 (fatcat@movielink.co.kr)
[3/8 개봉작 리뷰] <나비효과 2> - 전편만한 속편 없다
스물 다섯 살의 전도유망한 청년 닉(에릭 라이블리)은 잘 나가는 투자회사에서 근무하고 사랑스런 여자 친구 줄리(에리카 듀랜스)와도 행복한 날을 보낸다. 줄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과 바닷가로 떠난 여행에서 갑자기 돌아오기 전까지는. 여행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던 닉과 친구들은 닉의 직장상사로부터 온 전화 때문에 여행을 중단하고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한다. 병원에서 깨어난 닉은 애인과 친구들이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그로부터 1년 후, 여전히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닉은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어느 날 닉은 중요한 프리젠테이션 도중 극심한 두통으로 인한 발작을 겪는다. 집에 돌아온 닉은 줄리의 생일 날 찍은 여행 사진을 보던 중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정신이 든 닉은 여행지와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닉은 교통사고를 막아보려 애쓴다.
<나비효과 2 The Butterfly Effect 2>는 지난 2004년 개봉한 애쉬튼 커처 주연의 스릴러 <나비효과 The Butterfly Effect>의 속편이다. 개봉 당시 미국 평론가들로부터는 혹평을 받았지만 관객들로부터는 사랑을 듬뿍 받아 1,3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총 6,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나비효과>의 흥행 성공이 속편 제작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일. 주인공이 과거 사건이 일어났던 시점으로 돌아가 당시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 뜻밖의 결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 2>의 아이디어는 전편과 같다. 전편에서는 일기장이 과거로 가는 통로였다면 <나비효과 2>에서는 사진이 과거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나비효과 2>는 아이디어 외에는 전편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든 속편이다. 출연진과 감독이 바뀐 것은 물론 구성도 달라졌다. 전편이 에반(애쉬튼 커처)를 중심으로 친구들의 사연들이 교직되며 이야기를 촘촘하게 쌓아갔다면 <나비효과 2>는 주인공 닉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놓을 뿐이다. 친구들과 직장동료 등 닉의 주변 인물들은 존재감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심지어 애인인 줄리마저 설정을 위한 장치로 활용될 뿐이다.
<나비효과 2>는 성공한 전편의 아이디어만을 믿고 안일하게 제작된 속편의 대표적인 예가 될 법한 영화다. 목적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캐릭터와 엉성한 이야기 구조는 전편의 명성을 갉아먹는다. <나비효과 2>는 전편에서 보여줬던 카오스 이론에 대한 통찰이나 캐릭터 개개인에 대한 꼼꼼한 묘사 등이 제거된 채 전편의 아이디어에만 지나치게 기대 앙상한 구조만 남은 어설픈 속편이 되고 말았다. 미국 언론의 반응도 상당히 고약하다. "만들 필요조차 없었던 영화"라는 악평부터 "의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속편"이라는 비난까지, 혹평도 이만하면 재난 수준이다. '전편만한 속편 없다'는 평가에 딱 들어맞는 시시한 속편 <나비효과 2>의 연출은 <스콜피언 킹 The Scorpion King> <허니 Honey> <퍼펙트 맨 The Perfect Man> 등의 촬영감독 출신 존 R. 레오네티가 맡았고, 주인공 닉과 닉의 애인 줄리 역은 주로 TV에서 활약해온 에릭 라이블리와 에리카 듀랜스가 출연해 호흡을 맞췄다.
HOT 애쉬튼 커처가 주연한 <나비효과>의 속편이라는 점에 정보가 부족한 관객들은 흥미를 느낄 수 있다.
COLD 전작의 흥행을 등에 업은 어설픈 속편. 전편의 아이디어만 남아 있고 캐릭터도, 스토리도 미비한 앙상한 드라마다. ‘전편만한 속편 없다’는 평가에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
최상희 기자 (immerblau@movielink.co.kr)
[3/8 개봉작 리뷰] <천년을 흐르는 사랑> - 애타게 영원한 생을 찾아서
16세기 스페인, 기사 토마스(휴 잭맨)는 여왕 이자벨(레이첼 바이즈)의 명을 받아 생명의 나무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마야 정글에 숨겨진 이 전설의 나무에 다다르기 위한 토마스의 굳은 의지는 흉포한 원주민의 거센 공격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21세기 어느 연구실, 의사 톰(휴 잭맨)은 암에 걸린 아내 이지(레이첼 바이즈)를 살리고자 신약 개발에 몰두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지를 살려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구에 정진하고 있던 어느 날, 과테말라산 희귀종 나무에서 신약 개발의 희망을 발견한다. 26세기 우주 공간, 생명의 나무와 함께 영생의 비밀을 찾아 우주 여행을 하고 있는 톰(휴 잭맨)이 있다. 영생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성운에 곧 도착할 예정인 톰은 어쩐지 불안하다. 16세기 스페인의 이자벨 여왕과 21세기 이지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 The Fountain>은 "인간이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영화다. 편집증과 중독 등 인간의 이상심리를 묘사한 <파이 Pi>와 <레퀴엠 Requiem for a Dream> 등을 통해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죽음과 삶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화두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얼핏 보기에는 세 가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 가지의 다른 사랑의 모습을 그리는데 치중하는 듯 보이지만, <천년을 흐르는 사랑>에서 대런 아르노프스키가 강조하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의 영원한 생에 대한 갈망이다.
<천년을 흐르는 사랑>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구성 탓에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가 수월하지 않다. 게다가 생명의 나무만이 서로 다른 시대의 서로 다른 사랑 이야기를 이어주는 매개체가 될 뿐이라 제각각인 세 가지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지는 않는다. 느슨한 구성의 빈틈을 메우는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다. 휴 잭맨은 발군의 연기력으로 영생을 안겨줄 생명의 나무를 찾아 16세기와 21세기, 26세기를 헤매는 톰의 복잡한 내면을 소화해낸다. 16세기, 스페인의 이자벨 여왕, 21세기와 26세기의 여인 이지를 연기한 레이첼 바이즈의 신비로운 매력은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생명의 나무를 찾아다니는 톰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HOT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연출 아래 휴 잭맨, 레이첼 바이즈가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을 털어 놓는다는 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COLD 세 가지 시대의 세 가지 사랑 이야기가 복잡하지만 모호하게 얽혀 있는 느슨한 구성은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김영서 기자 (nodata@movielin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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